일본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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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일본군 위안부(日本軍慰安婦) 또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日本軍性奴隸制度)일본 전쟁범죄의 하나[* 가장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 중 하나인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UN OHCHR)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1]]) 2017년에도 책임자에 대한 제재 및 처벌을 촉구한 바 있다.([[2]])]로, 일본 정부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 및 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취업 사기 또는 강제 연행을 통해 모집했는데, 이를 자기들의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취업 사기의 경우 일본인, 친일파 브로커를 통해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며 모집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보내기도 했으며, 강제 연행은 주로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행정 당국의 묵인 또는 방조 하에 일본군일본 경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는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의 의사에 반한 반인륜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였다.

파일:N4nXsmh.jpg 하지만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정부는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을 타결시켰다. 원래는 이 타결로 국제적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종지부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는 사실상 지켜지고 있지 않다. 이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2017년 7월 11일 문재인 정부8월 14일[*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식 증언한 날이다.]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로 공식 지정하였다. [[3]]


  • 짐승같은 日 군인 "조선 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

2018-09-22

일제는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군대 내에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데려다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전쟁 내내 위안부를 운영하며 성노예로 여성을 부려먹던 일본 군인.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쯤 식량보급이 중단되자 상상조차 힘든 일을 벌였다.

자신들이 성노예로 부려먹던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일본도로 토막내 나눠먹은 것.

일제가 식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한의 희생자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17살 나이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중국 난징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박 할머니는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던 박 할머니는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그 모습을 본 일본 군인들은 껄껄 웃으며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다"고 조롱했다는 것이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http://segye.com/view/20180922000171


  •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기획-‘위안부’, 책임지지 않는 일본①] 위안부 연구의 선구자 윤정옥

2017년 05월 21일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6900


  • “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기획-‘위안부’, 책임지지 않는 일본①-2]생존자들이 입증하고 있는 강제연행의 실상-사기, 납치, 인신매매

2017년 05월 21일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6902


  •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기획-‘위안부’②] 강간을 ‘조선 정벌’이라 말해, ‘말 안 듣는다’며 칼로 찌르기도

2017년 05월 27일

박영심 할머니는 1921년 겨울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는 집에서 늘 외로웠다고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던 열일곱 살의 박영심은 친구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끌려갔다. 일본 순사는 검은 제복에 별 두 개를 달고 있었고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평양역으로 끌려간 박영심과 친구는 다른 15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압송됐다. 1939년의 봄이었다.

남경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는데, 병영으로부터 5백미터 떨어진 곳에 3층짜리 벽돌건물이 있었다. 빈 깡통들을 매달아놓은 가시철조망이 무시무시하게 드리워져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다. 일본군들은 그 곳을 ‘긴스이루’ 위안소라고 했다. 안으로 끌려들어가 보니 가로세로 약 2미터·2미터50센티 정도로 똑같은 크기의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방에는 침대만 하나씩 있었다. 박영심에겐 2층의 19번째 방이 배정됐다.

그들은 박영심을 우타마루(歌丸)라고 부르며, 19호실 방문에 우타마루라는 이름과 번호를 붙여놨다.

해가 뜨면 일본군들이 몰려왔다. 아침으로 쌀밥 한공기와 몇 조각의 무우 절임을 먹고 나면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하루 평균 30여명이 왔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면 일본군은 그녀를 다락방으로 끌고 가 발가벗긴 뒤 매질을 하곤 했다.

일본군들은 보급 받은 ‘돌격1번’(콘돔)을 들고 왔다. 또한 그들은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는 것을 ‘정벌’이라 표현했다. 2010년 공개된 일본 육군 제6사단 소속의 무토 아키이치 분대장의 1938년 일기에도 ‘오늘은 즐거운 나들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에 나섰다. 순서는 네 번째였다. 도미꼬, 경상남도’라고 씌어 있다.


“일본군은 하나와 같이 포악무도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어느 날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한 장교 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구두발로 차다 못해 긴 칼을 뽑아 나의 목에 대고 당장 죽일 것처럼 위협하고는 ‘황군’의 맛이 어떤가 보라고 하면서 자기의 수욕을 채웠다.”

어느 날은 일본군이 ‘요구대로 따르지 않는다’며 박영심의 배를 칼로 쑤셨다. 배의 정 가운데 5센티미터에 이르는 자상을 입었고 피가 쏟아졌다. 중국인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나서야 살아났다.


일본군들은 위안부들이 임신을 하면 자궁까지 도려냈다. 그리고 다시 위안부로 ‘사용’했다. 위안부로 쓰던 소녀들이 에 걸리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면 어디론가 실어갔는데,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아니면 가차 없이 강물에 처넣어 죽이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 중에 상대인 일본군에 맞아 죽거나 다른 위안부들이 보는 앞에서 처벌을 당해 죽은 경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박 할머니의 증언에선 더 끔찍한 사실도 드러난다.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 (중략)..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

일본군들은 말을 듣지 않는 소녀들을 가마솥에 넣었다고 태연히 말했다. 유사한 증언이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17살에 끌려간 피해자 유선옥 할머니(함경북도 경흥군)가 있던 위안소에선 일본군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위안부의 목을 잘라서 보여주곤 가마솥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삶은 물을 위안부들에게 강제로 먹였다. 14살에 끌려갔던 정옥순 할머니(함경남도 풍산군)도 같은 증언을 한다. 일본 장교는 “남자를 하룻밤에 백 명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손을 들으라”고 한 뒤, 손을 들지 않고 대들었던 15명의 소녀를 벌거벗긴 채 못 판에 굴렸다. 소녀들의 몸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일본 장교는 이들의 목을 칼로 베고 역시 가마솥에 넣었다. 그리고선 “개 죽이는 것 보다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 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긴스이루에서 3년여를 보낸 박영심은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끌려 상해를 거쳐 버마 랑군 부근의 라시오 위안소에 옮겨졌다. 여기선 다시 ‘와카하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이곳에선 7명의 위안부 가운데 4명만 살아남았다고 박영심은 기억한다.

라시오의 위안소에서 2년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버마-중국의 국경지대인 윈난성의 송산으로, 다시 라모로 끌려갔다. 이때가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매일 수많은 폭탄과 포탄이 날아와 터졌고, 이곳으로 끌려온 12명의 조선 여성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선에서 하루 30~40여명의 일본 군인을 치러야 했다. 이들 조선인 여성 12명 중 8명이 폭격에 죽거나 일본군에 맞아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 날 군기를 태운다는 일본군들의 말을 엿듣고 패전을 예감한 박영심은 남은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도망쳤다. 박영심은 어느 중국인 농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중국군에 의해 체포돼 곤명의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다. 그녀는 당시 만삭의 임신 상태였으나 포로수용소에서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당시 곤명의 포로수용소엔 조선인이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 있었다. 조선인 여성 가운데 박영심을 포함한 10명은 송산 지역에서 체포됐고, 나머지 13명은 등충 인근에서 체포됐다. 등충의 위안소에선 중국군에 의해 등충이 함락되기 전 일본군들이 위안부 30명을 총살한 기록이 발견됐다.

박영심이 고향으로 돌아온 건 8년만인 1946년이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종군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1967년 결국 자궁을 드러낸 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힘든 여생을 살아왔다. 1993년 박 할머니는 피해를 알려 ‘한을 풀고 싶다’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2000년 12월엔 여성국제법정에 증언자로 참가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방문했으나,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생각나 먹는 일도, 말하는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빠졌다. 박 할머니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됐다. 2003년엔 지원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중국 남경과 운남성 송산을 답사했다. 박 할머니는 남경의 위안소 건물에 들어선 뒤 소리 내어 울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2006년 8월7일 향년 85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6999

위안부 상세

위안부 명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위안부' 적을 때 작은따옴표 붙여야 하는 이유] 이는 통상적으로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위안'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하기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흔히 정신대와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신대(挺身隊)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이며 일제에 의해 노동인력으로 징발당한 사람들을 말한다. 정신대에는 남자도 동원되었다. 어미 때문에 혼동되고, 또 정신대로 징집된 여성들 일부가 전쟁 말기에 위안부로 뽑혀나갔으나 정신대와 위안부는 엄연히 다르다.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정신대는 노동인력을 이르는 말이고 위안부는 성노예를 지칭한다.

일본에서 위안부는 주로 전쟁터에서 장병들을 상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영어로 a comfort woman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를 종군 위안부라 하고 있다. 외국에서, 특히 웹사이트를 이용할 시엔 sex slave 보다는 a comfort woman 또는 comfort women으로 검색해야 보다 자세한 위안부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준말로 쓰이나 이는 최근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주로 전쟁 때 군대에서 남자들을 성적으로 위안하기 위하여 동원된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 지칭하며 기사에 실었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그냥 매춘부였으며 [판결에도 명시되어 있다.] 지금은 표준 국어대사전에서 강제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피해 여성들 중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일본 기업체의 위안소에서 생활한 여성들도 많았다. 정부에서는 이들도 위안부로 강제 징집 되어 피해 받은 여성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학술 조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위안부란 단어가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지고 세간의 시선이 그쪽으로만 쏠리는 바람에 생겨난 사각지대인 것이다.

명칭을 정확히 하면서도 순화하여 쓰자는 것 중에는 강제징용녀(强制徵用女) 또는 강제성징용녀(强制性徵用女)가 있으나 아직까지 널리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전체 18명 중 1명이 일본군 성노예(Japanese Army Sex Slaves)라고 표현할 것을 제안했으나 따로 채택되지는 않았고 소수의견이다.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일본 우익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하게는 1930년대 후반에 처음 일본에서 위안부를 조달, 전선에 보낼 때부터 쓰던 공식적인 호칭이다.]라는 표현은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성노예 여성들 중 상당수는 약취유인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인데 종군이라는 단어는 그런 실상과는 달리 '스스로의 의지' 로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갔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독자연구[* 본문의 주장과는 달리 從軍과 같은 한자의 서술어 + 목적어 구조는 자발적인 행동, 비자발적인 행동 모두에 쓰인다.]). 학술적으로 표현할 때 당대의 명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런 상황이 아닐 경우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 심지어 한때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 네덜란드 여성들까지 위안부로 끌려갔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Victims)"라 하지 말고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Violence Victims)"라고 쓰자는 주장도 나왔다. "위안부"란 말 자체가 군인 위문하러 갔다는 뜻으로 이것도 잘못된 표현이라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건]을 보자.

일단 대한민국 현행법(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배경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7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 가량이 성병으로 폐인이 되었다. 이런 병력손실을 막기 위하여 1931년 9월 만주사변 당시에는 군용 공창가(公娼街)를 만들어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위안소가 생겼다. 최전선 수비대를 위해서는 출장 위안부가 파견되기도 하는 등 이때부터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최영종, 《불충신민》(한누리미디어, 2004) 198페이지]

초기의 위안부 모집은 공개 모집, 광고 등을 통하였다. 1938년 1월의 중일전쟁 때는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다.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는데 조선 여자들은 대부분 한반도 남부 출신이었다.[* 최영종, 《불충신민》(한누리미디어, 2004) 199페이지]

이들 위안부는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쟁의 확대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일본 군부는 마침내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41년 7월 관동군(關東軍) 24만 명을 75만 명으로 증강시켜 대(對)소련 전략의 일환으로 삼았으며 이 때 관동군 보급담당 참모 하라가 조선총독부를 방문 조선 '도라지꽃' 2만 명을 요구, 1만 명을 관동군 쪽으로 끌어갔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강제 차출은 다른 곳에서도 요구되어 타이완 총독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위안부 차출이 계속되었다.[* 최영종, 《불충신민》(한누리미디어, 2004) 199페이지]

피해자들 국적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남북한 모두), 중국,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캄보디아, 심지어는 당시 주권국이었던 태국이나 러시아, 호주, 뉴질랜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네덜란드, 미국, 영국, 프랑스 출신 등 여러 국가 출신의 여성들이 강제로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래서 일본군에 잡힌 적국 포로나 점령지 주민 여성들은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한국, 대만 등 일본제국의 일부였던 지역은 민간업자가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으로 데리고 간 경우가 절대다수다. 전자의 경우(적국 여성), 식민지당국민 외에 타국 여성들의 위안부 편성은 모집방법과 운영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나 명령하달 자료가 부족하여 군수뇌부에서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관리한 것이라기 보다는 병사나 장교등 군 개개인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납치 및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한국 출신이 아닌 위안부 피해자들도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그런데다가 일본군은 일본 현지인이 아닌 모두를 물건으로 봤다. 더욱 웃기는 일은, 당시 법률로 일본 영토였던 오키나와도 본토에게 무시를 받았다. 더더군다나 징병검사에서 떨어지거나, 식민지에서 사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본 현지인도 차별받았다. 실제로 저들은 비국민(非國民)이라는 멸칭까지 듣고, 정부와 같은 일본 현지인에게 온갖 탄압을 받았다. 이때 일본 제국은 골육상잔도 서슴지 않았다.

이웃 나라 위안부의 경우 홍콩에는 중국인 외에 영국인 위안부들도 여럿 있었다. 일본이 1941년 홍콩을 점령한 후 중국계든 영국계든 여자들을 헌병 풀어 닥치는 데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홍콩의 경우는 다행히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다.

참고로 두 중국, 즉 대만중국은 둘 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중국은 모택동이 "우리가 이겼으니까 됐다"는 지랄병(...)이 걸려서, 대만은 큰소리 치기엔 자기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운영과 관리 및 생활실태

취업알선 브로커나 취업사기등을 통하여 의사에 반하여 일본군'위안부'가 된 사례가 다수인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급여와 연봉, 복리후생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증언에 의하면 구타와 가해가 일상적이었고, 군도나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고문, 학대가 흔하였다고 한다.[* 예컨대 이런 증언 [[4]]]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막장 일본군의 수준에 맞게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의 위안부 심문보고서는 이와 상반되는 내용을 기록하고있다. 이 자료는 버마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여성을 심문하여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현재 나오고 있는 증언이나 일본측 공문서 외에 제3국이 기록한 중립적인 위안부 심문 자료로서[* 근본적인 성격을 따지자면, 이 자료도 사실 증언록이다. 심문기관과 증인의 증언시기만 차이가 날뿐.][*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편사연구관에 따르면, 이 자료는 심문 과정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로 피해자의 입장반영이 다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5]] 기사 내용을 요약한다면, 미군 내에서 일본군 포로 심문을 맡았던 사람들은 일본인 2세 미국인들인 니세이들이었는데, 정작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말을 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일본인 중간 포주(마마상)를 통해서 증언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중간 포주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내용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취업사기나 노동착취 등 위안부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군의 위안부 심문보고서.[[6]]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년 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을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 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엔의 보상을 받았다.


>The interrogations show the average Korean "comfort girl" to be about twenty-five years old, uneducated, childish, and selfish >한국인 위안부 여성은 평균적으로 만 25세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였고, 유치하며 이기적이었다.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미치나에 있던 여성들은 보통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한 방에 한명씩 생활하였고, 그 방에서 생활과 성매매를 병행하였다. 음식은 포주를 통해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그들은 버마에서 2년 동안 다른곳과 달리 꽤 호화스럽게 지냈다.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을 배급받지는 못했으나, 돈이 많았기에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어서 옷, 신발, 담배, 화장품 등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배송받은 병사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을 동안 그들은 장교들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사교적인 모임으로서 소풍과 각종 오락,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즐거워 했다. 축음기도 가지고 있었고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위안부 포주는 위안부 여성이 처음에 가지고 있는 빚의 액수에 따라 수입의 50~60%를 수수료로 가져갔다.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에컨데, 위안부 여성은 1달 평균 1,500엔 정도를 벌어 들이고 이중 750엔을 포주에게 상납하였다.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많은 포주들은 식료품과 다른 물품들을 (위안부 여성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아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다.

보고서에서는 폭행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없고, 위생관리나 건강관리가 철두철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위안부 평균 연령이 만 25세로 미성년들이 수없이 차출되었다는 주장과도 배치되었다. 건강관리나 위생관리에 대해서는 미군보고서의 기록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위생이나 건강관리를 부실하게 하여 성병감염이나, 폭행으로 인한 부상에 노출되게 방치하면 이를 이용하는 군인의 건강관리와 직결되어 병력손실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리부실로 만성적인 영양실조나 폭행 및 고문등으로 상해를 입거나 사망에 이를 경우 보급(?)에 지장이 생긴다. 특히 전쟁 말기에는 무모한 모집방식과 달리 모집한 인원을 전선으로 보내는 것에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의 여성단체들이 자신들의 운동과 수익사업을 위해 문제를 실제보다 더 자극적으로 이미지를 심어놓은 탓이 크다. 군대 갔다온 사람이면 대부분 공감하는 일이지만 군부대는 부대의 사정에 따라 모든 것이 천차만별이다. 위안부의 생활 환경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곳은 위 미군 보고서에 나온 것처럼 인간적으로 대우해준 곳도 많고 반면에 또 어떤곳은 위안부들을 옥쇄에 동원해서 몰살당하게 만든 곳도 있다. 위안부 문제가 기본적으로 일본이 잘못한 거라고 해서 그걸 전체적으로 자극적인 방향으로 뭉개서 위안부들은 전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한걸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디테일하게 사실로 봐야지 이런 식의 접근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언제 어느 부대에서는 위안부들을 어떻게 학대했고, 또 다른 어느 부대에서는 얼만큼 대해줬고 등등 이것들을 명확하게 해야 일본 측도 납득할 것이다.

그 외에도 보고서에서는 House Master라는 일종의 포주 혹은 중개업자(이하 중개업자로 지칭)의 존재가 거론되고, 대부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이 이들 포주로부터 개인 부채 즉 빚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문건에서는 단순히 직업알선, 소개 등의 명목의 수수료가 아니라 개인부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 원리금의 성격이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것이 링크의 영어원문의 모집부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중개업자가 선금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가족부채를 6개월에서 1년간 대리 지불해주는 것을 대가로 위안부 여성의 매매계약 및 모집이 이루어져 있다고 나와있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구매비용의 개념으로 이후 월급 1,500엔에서 50~60% 가량을 원리금으로 징수하여 이득을 올렸는데 통상적으로 근로기준법에 의거한 대등한 계약관계라기 보다 거액의 선금을 지불하여 인신을 매입하고, 그 부채를 기반으로 원리금을 받는 인신매매의 성격을 보이고있다. 모집요강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주로 병원에서 근무하거나, 붕대를 감거나, 병사들을 행복하는 것에 대한 것은 나오지만 매춘행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 없고, 단지 쉬운일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을 전제로 지원했다는 점이 확인되므로, 앞선 항목에서 나온 취업사기와 인신매매와 연대해서 볼 수 있는 증거자료로 확인된다.

당시 급여액 1,500엔의 액수 자체도 육군 대장의 월급계보다 많은 액수였는데, 거기서 원리금(원금+이자)이 5~60%인 것으로 보아 개인부채가 엄청나게 높았음이 확인된다. 그밖에 급여의 액수가 고액인 것과는 별개로 주 생필품을 중개업자들을 통하여 구입하여야 됐고, 그 가격이 비싸서 생활이 녹록치 않았는데, 그와 정반대로 생존과 상관 없는 담배나 전축 및 화장품 등의 사치품 구매에는 큰 지장이 없는 등 비정상적인 지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월급의 지급은 군용 우편계좌(군표)로 입금되거나, 현지 발행 화폐였던 남방개발금고권(남발권)으로 지급되었다. 본래 남발권은 엔화와 동일한 가치로 환전이 가능하고, 군표의 잔액을 엔화로 출금하는 것도 자유로웠었지만, 1944년에 이르자 버마지역이 전쟁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30배가 치솟자 일본당국이 인플레이션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엔화환전을 금지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월급액 1,500엔은 당시 일본육군 월급 중 가장높은 대장의 것보다 높은 액수였지만, 1944년이 되자 이 액수가 전부 현지화폐로만 출금이 가능하여 실질가치가 형편없었다. 실제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인 문옥주씨의 당시 계좌내역에서도 인플레이션시기에 저금액의 수가 급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고액의 월급을 지급받았지만, 고율의 원리금, 고액의 생계비에 허덕여야 했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저축하였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어버려 종전 후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 밖에는 전쟁말기 전 일본제국신민이 대의와 충절을 위해 목숨을 바치여 할 것을 강요하는 옥쇄 정책에 영향을 받아 최일선에 있는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다만,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을 보면 위안부들도 옥쇄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따로 항복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버마에서 포로가된 조선인 위안부가 이런 경우.

피해자 증언

[youtube(azQj4ktgA0k)] 뉴스타파 <슬픈 귀향> 1부

[youtube(gRIdR-3S5TA)] 뉴스타파 <슬픈 귀향> 2부

>15살이 되던 해에 밤에 잠을 자고 있을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저를 끌고 갔습니다. 그놈들은 제가 군인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더니 전기고문도 하고 칼로 찔러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놈들이 어린아이들을 끌고가서 군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전기고문을 하고 칼로 찔러서 몸을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었겠습니까?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 일본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다.[br] -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나라가 없었어. 왜놈들 땅이라. 나라가 없는 백성이 되니까 자기들 맘대로 잡아가는거야. 잡아다 일본땅에 끌려갔어. 일본땅에 가서 나고야로 끌려갔는데 거기 가니까 많이 있어요. 여자들이, 처녀들이, 각시들이랑 만주로 데려갔어, 만주로. 상해(상하이)라는 곳으로 끌려갔어. 상해 데려가서 그 때부터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어. 그래서 7년을 했어, 7년을. [br] - 위안부 피해자 故 박숙이 할머니(2016년 작고)[* 2016년 12월 6일 저녁 향년 93세를 일기로 경남 남해군의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일본군이)내가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발길로 차고, 악을 쓰는데도 차고 때리고, 정 말을 안 들으니까 너무 때려서 사람이 쓰러지니까 깔고 앉았어. 칼로 옷을 다 오려내요(잘라내요). 여길 다 오리면(자르면) (옷이) 뚫리면 어떻게 되겠어. 피밖에 더 나겠어. 시뻘건 피가 철철 나오는데 거기다가 대고 강간을 하는거야. (일본군이) 여기(엄지발톱)를 자르느라고 칼로 이렇게 쳤는데 이게 안 떨어졌단 말이야. 지금도 내가 흉터가 없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데 흉터가 있기 때문에 못 잊어버리지. [br] -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여자라는 것은 생리가 있는데 생리 때도 (일본군은)가리지 않아요. 그놈들은 생리고 뭐고 없어요. 무슨 짐짝 끌어가듯 끌어가다 자기네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든가 하면 버리거나 죽여버려요.[br] - 위안부 피해자 故 김학순 할머니(1997년 작고)

>이제부터 대일본제국에 한 몸 바쳐 몸 주고 성노예 생활에 몸 주고 말 잘 듣겠나? 이 처녀가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낫지, 너희 개 같은 놈들한테 이렇게 맨날 이 단련을 받겠나? 차라리 죽는게 낫지 죽여달라했는데 그러니까 (일본군이)좋다. 그 다음에 가마니를 하나 끌어다놓고 졸병을 시켜서 모가지 잘라라 모가지 잘라 가마니에 넣고 팔 잘라라. 팔 잘라서 가마니에 넣고 다리 잘라라. 다리 잘라서 다 잘라 담고 뭄뚱이도 그저 몇 토막을 쳐서 가마니에 다 주워 담는 것을 보고 그걸 보고는 그 처녀들이 다 악악 소리치고 그 자리에서 다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놀라서. 그 처녀들이 다 기절해서 그걸 보고 죽어 널브러진 처녀들을 모조리 하나하나 잡아끌어 세워놓고 (일본군이)자, 똑똑히 보아라, 너희도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다 죽인다. 너희 목숨이 두려우면 대일본제국에 한 몸 바쳐 말 잘 들어라.(하략)[br] - 북한 출신 위안부 피해자 故 리경생 할머니(2004년 작고)

>이 아이들이 말 안 듣는다고 일본군 부대 대대장이 칼을 척 쥐고 나서서 너희들이 왜 말을 안 듣냐? 남자 하룻밤에 백 명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손을 들으라 하니까 우리는 14살이다. 두 손 들었다. 그런데 아까 이름부른 아이들은 손을 안 들더구먼요. 무슨 의견이 있어서 손 안 든거야? 묻는다. 의견이 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남자 백 명을 상대하냐. 우리의 죄는 나라없는 죄밖에 없다. 나라 없는 벌이냐? 그 사람들이 그 간부들한테 들이댄다. 저X의 계집애들이 점점 말 안 듣는다고 못판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가게만해. 거기서 못 한 300개를 심었어요. 이런 가시 같아요. 아이들 빤쓰만 입히고 발가벗겨서 두 명 다리 동여매서 두 명씩 머리채를 쥐고서는 이렇게 한 바퀴 칭 올려 끈다. 못판에다가. 그게 못판 고문이다. 그러니까 빤쓰가 다 찢기니까 하초에 닿으니까 구멍에 살이 뚫려서... 사람 피는, 짐승 피는 땅에 줄줄 흐르지요? 국숫발같이 (피가) 팍팍 뿜어요. 그렇게 15명 죽여놓고서는 칼로 목을 쳤다. 칼을 목을 쳐서 죽여놓고서는 우리들이 거기서 눈을 뜨고 못 보겠어. 하늘이 노랗고 땅이 새빨갛고. 그래놓고 우리가 우니까 죽였다고 그러냐? 너희 계집애들도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인다. 말 안 듣는 계집애들 죽이는 건 개 죽이는 것보다 아깝지 않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일본군)졸병 놈들이 (시신들을)어디다가 묻을까요? 일본군 대대장, 중대장이 말하길 묻기는 뭘 묻어, 땅도 아깝다, 흙도 아깝다, 죄인들은 변소에 처 넣어라. 우리가 우니까 (일본군)소대장이 저 계집애들이 사람 고기를 못 먹어서 운다는거야. 우리 고기 삶아서 한 번씩 먹이라는거야. 가마솥을 내다 걸고서는 불을 때서 (시신들을)고기로 함지에다가 푹 놓고서는 우리보고 먹으라 한다. (사람)고기를 먹어라. 왜 안 먹느냐? 그래도 안 먹었다.[br] - 북한 출신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

피해자 증언의 한계

기록도 남지 않은 몇 십년 전의 기억에 대해서 정확한 증언을 바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일부 피해자들은 심각한 정신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정말 끔찍하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을 몇십 년 동안이나 일 단위로 정확하게 기억해서 증언할 수 있겠는가?(PTSD 문서 참조) 생존자들을 상대로 버마나 싱가포르를 헷갈린다고 공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심지어는 '이남이 할머니'[* 마산에 살던 '이남이 할머니' 는 17세이던 1943년 일본 경찰에 의해 납치되어 성노예로 끌려갔다. 캄보디아 전선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으나 귀국할 방도가 없어 현지인과 결혼하고 캄보디아에서 살면서 킬링필드의 비극을 또 겪었고 한국어도 잊어버려 1997년 처음 한국 언론에 알려졌을 때는 '훈 할머니' 라고 불렸다. 한국인임이 밝혀져 1998년 귀국하고 DNA 검사를 통해 아직 살아있던 여동생을 만났으나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캄보디아로 귀국했다가 2001년에 사망했다. [[8]].] 처럼 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신의 본명과 한국어까지 잊어버린 사례도 있다.[* 심지어 [마사카즈마저 위안부 범죄에 관련되었는 말을 하는 분도 계셨다.] 참고로 말하지만 카와베 마사카즈는 죽음의 철도를 기획하고 만들때 공사도중 포로들이 힘들어하자 당황해하면서 공사를 중지했던' 사람이다.(그때문에 도쿄 전범 재판에서 만장일치 무죄 판결받았다.) 게다가 내용을 보면 그는 그 부관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훈장이며, 다음으로는 메마(버마어로 여자)다.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연하지만 저 내용은 병사들이 사령관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내용이지 지 입으로 직접 말했을리가 없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병사들이 사령관을 조롱하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가로 반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추모관의 경우에도 '피해자' 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 사건의 재구성은 명백히 한계를 드러낸 바 있다. 유대인이나 집시들 역시 트라우마가 심해 기억이 없어진 경우는 많다.

그러나 증언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 정도가 과격해짐으로써 겪은 사건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까지 있음은 분명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 증언 중에서는 초기에는 '일본인 남성의 돈을 벌 수 있다는 회유에 넘어가 (위안부에) 가게 되었다'[* 이는 현재까지의 문서 증거와 대체로 일치하는 위안부 모집 형태다.] 는 형태를 띈 것이 이후 십수년을 지나면서 '경찰이 집 안까지 들어와 강제로 나를 끌고 갔다' 는 증언으로 바뀐 실례가 분명히 존재하고 증언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특성이 2차세계대전까지의 일본군의 특성과 맞지 않고 오히려 2차세계대전 당시부터 1980년대까지의 주한미군의 특성[* 예를 들면 영어사용, 크리스마스 풍습, 헬리콥터 부대, 지프차, 6.25전쟁의 광경, 지퍼가 달려 있는 바지, 페니실린등.][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단, 해당 블로그가 증언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해도 그것이 모든 증언이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가 없다는 반증이 된다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실제로 여러 증언들 중에서 일관성 있고 반증이 부족한 증언들은 신뢰성이 있어 위안부 실태의 증거들 중 하나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해당 블로그 자체가 전형적인 일뽕+극우 성향을 보이는 블로그이니 열람시 주의를 요한다. 참고로 해당 블로그의 주인은 현 역사 갤러리의 거의 사상적 지주급인 사람이다.] 이렇게 증언의 내용이 과격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관찰 가능하며 위안부 연구에서 증언의 객관성을 의심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 한반도에서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되었다는 사례의 경우, 다른나라의 위안부와 달리 물증(다시 말하자면 기록)이 나오지 않았고 심증(다시 말하자면 증언)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한국인 피해자와 관련해서 거론할 때 한국인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데 피해자의 증언이 위안부 관련단체의 개입에 의해 과격한 내용으로 번복되는 일이 나온다.]

종전 이후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

>내가 너에게 70년의 삶을 설명하는 동안 70년의 삶이 지나갔다.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갔는가? -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중에서

>무엇보다도 나는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니까요. 저희는 위안부가 아니라 강간 피해자들(rape victims)입니다. -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 당시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태어나 거주하던 네덜란드인으로써 일본군이 자바섬을 점령한 뒤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되었다. 허나 일본은 수용소의 여성들과 자바원주민들을 데려다가 위안소를 만들었고 얀도 피해자중 한명이다. 그 뒤 당시 자바섬에 상륙했던 영국군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아 호주에서 살던 중 1992년 한국의 위안부들이 공식적으로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1992년 12월 9일 도쿄공청회에 나와서 한 말이다. 출처 : '위안부' 리포트 (저자 : 정경아)]

>그들은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라고 잡아뗀다. 모든 증거는 조작되었고 모든 증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명백한 것이 나오면 다른 이와의 공동 책임을 만들려 하기 시작하며, 급기야 필요악 따위를 역설하거나 나만 나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쁘기에 이상할 것이 없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 위안부 사실부정파를 비판하는 한 칼럼 中

>'내가 죄가 많아서 자식들한테까지' 오빠도 그렇게 됐고 언니도 그렇게 됐고 자식들한테 '다 내 죄다 내 죄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죠.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딸

>너희는 놀림감이 아니니까 당당해라. 당당해라 하면서도 미안했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이것을 괜히 밝혔나. 어머니한테 이 사실을 왜 공개를 하라고 했을까.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아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일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억울한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실제로, 국내로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향에서 버림받은 후 갈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던 끝에 슬프게도 주한미군 위안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존재했다. 그 이외의 피해자들은 그저 가슴에만 묻어둔 채 피해를 증언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당시 농촌 사회에 강하게 남아있던 유교적 편견이 주요 원인이었던 듯.

그러다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자 그동안의 고통을 받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직접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거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증언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9월 '정신대 실태조사대책위원회' 를 구성, 일본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에 신고를 하고 시위를 하면서 신상이 밝혀진 위안부 할머니와 그 가족들은 되레 이웃들에게 차별받았다. 위안부는 창녀라는 인식은 90년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고 남녀노소 직업 불문하고 심한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집값이 떨어질까 이사를 종용받았다. 어린 아이들이 창녀의 자식이라 놀림 받는 상황에서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사를 몇 번이나 해도 신상이 밝혀지면 다시 이웃에게 차별 받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 이에 아예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사람들도 있다. 사실 성의식 자체가 2000년대 들어서야 엄청나게 변했기 때문에 시대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정조'같은, 지금 보면 엄청나게 구시대적인 표현이 언론이고 민간이고 아주 보편적으로 쓰였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보편적 인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들', '시대의 안타까운 희생자' 정도이지, 절대 과거와 같은 오해들이 판치고 있지 않다. 대략 20여 년간 역사 바로세우기도 시행되었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젊은층 위주로 많이 변하면서 현재는 옛날의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중노년층보다 청년층이 이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이 많고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자리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이 문제에 대해 말 한번 잘못 했다간 자신이 쌓아온 거의 모든 명예를 내려놔야 할 수도 있는 수준.

현재

배상[* 문서 안에선 '보상' 이란 용어가 '배상' 과 혼재되고 있었으나 한국에서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보상은 국가나 정부의 합법적 행위에 의한 손실의 보전이고 과거 일제의 위안부 동원 문제처럼 국가 정부의 차원에서 이뤄졌다 한들 그 행위가 명백히 불법인 경우는 '배상'이라 쓰는 것이 옳다.] 문제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으로 1965년 이전에 벌어졌던 위안부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모두 해결된 것으로 합의하여, 그 대가로 현금, 차관 등 여러 방식으로 6억 달러 이상을 받았다. 즉 국제법적으로 배상을 다 받았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를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비용이었고, 외화가 부족한 한국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혹자는 일제 35년의 만행에 비해부족하다지만 식민지 입장에서 이만큼 받아낸 전례 자체가 많지 않거니와 국제조약을 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일본이 반성해서 준게 아니라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미국이 반쯤 협박한 결과로 토해놓은 것이기에 금액이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정부가 이런 상세한 조약내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받은 돈을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달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측에서 피해자들에게 개인배상을 하려 했던 것도 정부에서 거부했다. 한국정부의 개인배상 현황을 살펴보면, 일제시대에 군인·군속 및 노무자로서 사망한 피징용사망자 총 8,552명에게 1인당 300,000원, 총액 25억 6,560만원을 지급하고, 임금이 체불되거나 예금 및 채권을 잃어 버린 경우 등 총 74,963건에 대하여 1엔당 30원으로 계산하여 총 66억 1,695만 1천원을 지급하였다.[* 『한국 정부의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 과정』 최영호, 한일민족문제연구, 2005] 그런데 이 금액은 일본이 준 배상금의 5%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니 한국 국민들은 일본이 배상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일본은 한입으로 두말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게 됐다.

이후 일본에서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책임을 인정한 1990년대에는 한국 정부 또한 일본이 배상했음을 인정하고 1993년엔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2005년에 밝혔듯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나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선 일본의 법적 책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나 이 법적 책임이 배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진상규명, 진심 어린 사과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즉, 현재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일본에게 배상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진상규명이나 진심 어린 사과와 같은 법적 책임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나눔의 집 소속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한 위안부 관련 민간단체에서 일본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여 외교부와 마찰이 있다. 이들은 외교부가 자신들을 무시한 채, 일본과의 협상에 임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양금모씨는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으로 큰 포스코에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했다.

1998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의 위안부 재판에서 입법부작위에 의한 배상을 인정받아 위안부 피해자들이 [[9]]했다.[* 이 판결 이후 일본 민주당, 일본 사회민주당, 일본 공산당이 배상에 대한 입법안을 냈는데 상고심이 이뤄지고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이를 기각하면서 결국 일본 국회는 이를 폐기시켰다.] 그러나 2심에서 '법 제정은 입법부의 재량적 판단에 맡겨진다' 며 바로 판결이 뒤집혔고 2003년엔 3심인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2심의 판단을 인정하며 사건이 기각당해 원고 측이 패소했다. 이 탓에 반발이 일어 한국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10]]로 해당 판결을 규탄하기도 했다.

'시모노세키 소송' 의 최종심 이후 나온 2004년도의 [[11]]에서도 일본 최고재판소는 '군대위안부 관계의 상고인들이 입은 손실은 헌법의 시행 전의 행위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헌법 29조 3항[* 일본 헌법 제29조 제2항, 제3항 : '② 재산권의 내용은 공공복지에 적합하도록 법률로 이를 정한다', '③ 사유재산은 정당한 보상 아래, 이를 공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로 관련 기사에서 발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는 식으로 해석을 내린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한일기본조약으로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고, 그 내용을 피해자들에게 충분히 설명치 않았으므로 한국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였다. 또한, 이러한 한국정부의 행동은 헌법에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행위라고 판결하였다.[헌재의 관련 판례]를 참고.

이후 외교통상부는 [양자협의를 공식 제안]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은 끝났다' 라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아래 소개된 일본 신문의 한 기사에 나와있듯 이후 일본 정부가 한일 관계를 2012년 경 해결하는 노력을 보이려고는 했으나 양국의 입장차 탓에 실패로 끝났다고도 한다.

단, 무라야마 전 총리를 중심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단체가 성립하여, 비록 형식적으로는 민간자금기구였지만, 자금의 구성은 일본재정에서 충당하였으며, 이것을 통한 보상시도가 있었다. 금전 피해보상과 함께 평화의 편지가 동봉되었는데, 이 평화의 편지는 전총리가 아니라 당시 총리였던 하시모토가 쓴 것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전총리와, 현총리가 직접 개입하고 정부재정을 통해 보상을 한 것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민간단체에 의해 보상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부와 정부간의 외교협상이나 조약에 구애받지 않고서 피해자 개인에게 얼마든지 경제적인 지원이나 보상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중국과 필리핀 다수 피해 여성들에게 복지기금과 생활비지원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보상이 아닌 진정한 배상과 사죄를 원하기 때문에 이들 단체의 보상지원금의 수령이 거부되었다. 그래도 개인단위로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은 있어서 총 61명의 한국인 피해자가 여성기금의 보상을 받은 것으로 통계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개인적으로 일본 측의 위로금을 받기로 한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끼리 다툼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위안부 할머니 중 33명이 떨어져 나가서 무궁화 할머니회라는 자체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다른 국가와의 배상 문제를 보자면 일본 정부오스트레일리아[* 정확하게는 이 케이스는 티모르 섬에 표착한 호주 간호사 학살 사건과 연계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위안부와 관련된 케이스는 강요했는데 저항하자 고문한 뒤 풀어준 예가 보고된다.] 및 뉴질랜드, 홍콩 등지에서 백인 성노예 피해자[* 주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자바 섬 일대에서 다수 발생했다.]가 나타나자 사과하고 피해배상을 한 사례가 있으나 이것은 배상이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배상한 것뿐이다.[* 참고로 백인 성노예 피해자들은 2차세계대전 연합국 출신이다.]

중국과의 문제에서도 [문제와 비슷한 전개]가 이뤄지고 있다. 필리핀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도 배상이 이뤄지긴 했으나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은 미흡한 편이다.

그래도 중국은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일본의 전쟁범죄 자체에 대해 보상 받을만한건 다 받아냈다.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제2터미널이 대표적인 예로 일본이 중일전쟁 및 2차 세계대전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는 의미에서 터미널을 다 지어 준 것이다. 이는 1971년 최초 교섭을 시도한 화국봉이 절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배상을 다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호구 수준으로 중국에 놀아나며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줬다. 대만으로 간 중화민국도 1950년 중일 평화조약을 맺으며 받을 거 다 받아 갔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국력 차이 때문에 중국에 더 저자세인 것도 있지만 한국 외교의 협상력이 아쉬운 부분. [*이의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개인청구권이다. 위와 같은 국가 차원은 국제법적으로 한국도 이미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등에서 개인에 대한 배상에 대한 자세한 정보 요청]

오늘날 일본의 입장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 >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1조

공식적으로는 위안부 피해여성은 전쟁부역자로 분류되어서 이들에 대한 보상논의는 한국과 일본간에 정상국교를 위해 실시되었던 한일협정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위안부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때는 전쟁부역자로 징병, 징용대상자들과 한데묶여서 분류되고 거론되었는데, 문제는 한일협정 체결 완문을 보면 알겠지만, 전후 모든 배상문제를 전쟁부역자 보상문제까지 포함하여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본다고 합의 및 종결하여 일본으로서는 국제법적으로 배상책임이 전혀 없다.

물론 국제법적인 배상책임이 끝났다는 것이지, 전쟁부역자와 별개로 위안부는 별도로 논란거리가 되며 문제가 되었다. 2차세계대전 시점에서는 위안부가 거의 사장되고 설사 운영되더라도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거나 국가나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어쩌다 지휘관이 직업여성들을 불러다가 재량껏 운용하는 것이고 그나마도 쉬쉬하는 정도였으나,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국가와 군이 직접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운영하던 것이었고, 이로인한 피해자가 여러국적에 그 수도 많은데다 일본인으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윤리적인 문제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추후 공식적인 입장은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는 쪽이다. 1994년 8월 31일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무라야마 담화고노 담화,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사과 등 민주당, 일본 사회민주당, 일본 공산당 등의 중도~진보성향을 띠고 있는 정당에선 이 발언과 입장을 같이 한다.

허나 그런 공식적 입장에 모순되는, 주로 자민당 계열 우익 정치인들의 언행 역시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 2007년 아베 신조 총리가 '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 사실이 없다' 라는 발언을 한 데다 2012년과 2013년 하시모토 도루 등의 정치인 또한 그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망언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우익 정치인들은 조선에서는 일본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 동원은 없었으며 민간업자에 의해 동원된 거라고 주장한다. 결국엔 정권이 바뀌어서 문제다.

아베 총리는 위의 중국을 침략하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혔지만 한국과 이해관계가 직결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고노 담화는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본의 입장에선 흑역사나 다름없는 데다가 가뜩이나 나라의 이미지가 안 좋은데 더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게다가 이거 피해보상 문제를 걸고 넘어지면 밑도 끝도 없어 보이기 때문에 총력을 기울여서 막으려고 하고 있으며 일본의 기업이나 정치인들 또한 한 마음이 되어서 반박하고 있다.

2014년 10월 12일 일본외무성 홈페이지에 위안부 강제동원 인정 관련게시글이 삭제되었다. 일본 관방장관 측은 "오해를 피하려 정부가 작성하지 않은 위안부 관련 문서를 삭제했다"고 한다.[[12]] 그러나 이는 고노 담화 흔들기의 일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일본 교과서

1997년이 되어서야 7종의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등장했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있는 교과서에도 강제연행이 부인되어 기술되어있다.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은 주변국 등의 침략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

새역모 교과서는 위안부의 강제연행 기술을 삭제하고 있는데, 해당교과서 채택률은 약 4% 내외다.

가해자의 증언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었던 마쓰모토 마사요시가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다.] 일본군은 그 당시 위안부 동원 외에도 중국 부녀자들을 잡아와서 집단으로 강간하는 만행을 자주 저질렀으며 그런 짓을 하고도 나중에 지뢰를 밟아 죽은 병사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그 유명한 개념 군인 후나사카 히로시도 위안부의 참상을 증언하기도 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태평양 전쟁 당시 그 당시의 참상을 목격한 것을 만화로 그렸다. [[13]]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해당 문서 참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시민들 인식

사실상 일본의 우익이나 혐한들은 백이면 백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크게 3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첫번째는 위안부 문제 자체가 한국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 정확하게 말해서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는건 아니나, 위안부가 '강제성을 띄었다'라는 부분을 부정하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 몇몇 넷우익들은 위안부는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 주장은 위의 49호 보고서나[[14]](바타비아에서의 강제 징용이 있었단 자료를 참고해 반박하면 좋다. 물론 넷우익들은 이 모든 것을 선동이라 하니까 파이팅!]두번째 양상은 위안부의 강제성은 인정하되, 전쟁중이니까 당연한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아예 위안부 문제 자체를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제국시대때는 당연한 것'이라고 합리화 하는 경우이다. 덧붙여 '그렇게 치면 한국군도 위안부 있지 않냐?', '그렇게 치면 한국군도 저지른 만행이 많다'[* 물론 이 논리를 들먹이며 일본군을 쉴드치는 것 자체가 논점 흐리기와 물타기 인건 맞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비록 한국군이 만행을 저지른 사실이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2차 대전 당시에 저지른 것은 엄청난 만행이었고, 애초에 일본인들이 '한국군이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라면서 일본군을 쉴드쳐봤자, 지들이 피해자도 아닌데다 물타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논점 흐리기와 물타기도 일삼는다. 세번째 양상은 강제성도 인정하고 합리화하지도 않되,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이후로 이미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이제 거론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입장이다. 즉 배상이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이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주장은 일본이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이후로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 했단 것을 지적하면 좋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점은, 우익이나 혐한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위와 같이 반응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일본 국민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일본 국민들 중에서도 위안부는 부끄러운 역사이며 한국에게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파일:귀향 일본 관객 반응.png (영화 '귀향'을 본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의 반응)[[15]]

일본에서는 젊은 세대(주로 10대, 20대)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세대가 훨씬 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 사죄해야 할 역사라는 입장을 보이며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전쟁 시대를 직접 겪으면서 일본이 한국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시간으로 보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반면 역사 교육을 오로지 왜곡된 일본 교과서로밖에 배우지 못한 일본의 젊은 세대 중에서 훨씬 우익이나 혐한들이 더 많은데, 이러한 원인은 상술했듯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우경화 교육을 엄청나게 많이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사실상 인터넷 전역 대부분이 우익 성향을 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일본의 어르신 세대는 극단적인 우익성 인터넷 문화에 많이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나마 우익 선동에 많이 당하지 않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외도 많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무조건 우익이고, 어르신이면 무조건 정상적인 성향이라고 단정하는 건 옳지 않다.

일본의 일부 여성인권, 페미니즘 단체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록 피해자가 한국일지라도, 전세계 여성 인권을 위해서라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한다는 신조 때문인지 의외로 일본 내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단체중 페미니즘 관련 집단도 제법 있는 편이다.

2017년 11월 25일 이와 관련해 도쿄에서 300명 가량의 인원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양심 시민들, “위안부 문제 제대로 해결하라” 촛불 들어]

수요집회 그리고 세계인들의 반응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 는 통상적인 이미지는 대체로 오해다. 일본은 고노 담화 전후로 수 차례 분명한 단어를 선택해 사과하였고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서도 사과문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정대협측은 이러한 사과를 끝끝내 몇 차례 거절하였으며(대표적인 예가 정부 차원의 인정과 보상을 요구한 아시아여성기금이다) 연구자들은 (위안부 피해자 본인이 아닌 정대협이) '과연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추구하고 있는지' 회의감을 가진다. 이미 한일기본조약에서 배상은 이뤄졌고 사과 역시 고노 담화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20년간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정기 집회를 하고 있다. 이 집회는 일본인 변호사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이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다들 돌아가시거나 건강이 나빠져서, 현재는 한일 양국의 위안부 대책 여성단체 회원들이 주도한다. 특히 일본 내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가하여 목사, 사제, 수도자 등 기독교 성직자들이 많이 보인다.[[16]]

단,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는 잠시 집회를 연기하였으며 도호쿠 대지진 때는 집회시에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수요집회 참여 방법으로는 [[17]]에서 참가신청을 하고 가거나 참가신청을 하지 않아도 수요일 12시 주한일본대사관 앞으로 오면 언제든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 집회에 한국은 물론 중국본토나 대만, 홍콩 등에서 중국인 피해자나 가족들도 대거 참가하기도 한다.

2011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뉴욕 퀸스의 홀로코스트 센터에서 [참상을 알리는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렇게 양자협의를 거절하면서도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는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평화비를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일본은 우리 정부에 [세우는 걸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날에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인간사슬로 외무성을 포위]하겠다고 한다! 동시에 전세계 곳곳에서 [[18]]도 열렸다. 또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할머니들을 뉴욕에 초청, 나치와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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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000회가 되는 12월 14일 예정대로 평화비가 세워졌고 그날 집회에는 약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집회를 하였다. 도쿄에서도 인간사슬로 외무성을 1시간 동안 포위했으나 그 앞에서 우익단체들이 맞불시위를 벌여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youtube(cscjsNGHQCo)]

1000회 수요집회를 기념하여 인간띠를 만들었던 전후사정과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한 자료(일본어 해석 필요). WAM(Women's Active Museum)의 모습이 보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진이 있는 곳. 참고로 저 할머니들의 국적은 대한민국, 북한, 중국은 물론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호주 심지어 네덜란드도 있다!

2012년 연말에는 한 청년이 수요집회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본을 향해 "응답하라 일본!"이라는 제목의 [시위를 하여 잠시 화제가 되었다.] 그가 서있는 곳은 일본 외무성 앞인데, 보통 국회 앞이나 수상 관저 등에서 이루어지는 관련 시위를 생각해볼 때 외무성 앞 1인 시위는 기발한 발상이었다는 것이 현지 운동가들의 전언. [[19]]

서구권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였으나 한국과 중국, 홍콩 등 아시아권에서의 계속된 홍보로 이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관심이 크지 않은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왜 [남의 나라 문제를 지속적으로 거론하냐는 인식도 적지 않은편이다]. 물론 이는 악질 와패니즈들이고, 홍콩을 식민지로 가지던 영국은 되려 자기네 이주민들이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징병으로 끌려가는 통에 이를 이해해 준다. 그리고 영미권은 유럽보다 더 여성 대상의 범죄에 대해 민감하고 죽일 놈 취급을 한다.

2016년 이후에는 상기한 한일외교장관회담 결과에 따라 주한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평화비가 철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결한다고 언급하진 않았으므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 방안이 채택될 듯 하지만... 피해 당사자 측과 시민단체 측에서는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만큼 크게 만들지는 못할 망정 무슨 이전은 무슨!!!" 이라고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게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시민단체에서 정부 돈 한 푼 안 받고 직접 조성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그거 이전하면 어떨까?' 하는 정도로 공문 한 장 보낼 수는 있겠지만 강제로 이전은 못한다. 게다가 일본 언론들이 벌써부터 김칫국 드링킹을 하며 위안부 평화비에 대한 언플이 상당히 심해지고 있는 것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이걸 이전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도 엄청난 무리수이다. 일본 정부에서도 '우리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모든 사항은 합의문에 나온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우리는 그런 이면 합의를 안 했고, 만약 했다면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라면서 진화를 하고 있다지만 글쎄...?

일부 재일 외국인들과 재한 외국인들의 위안부 문제 비하, 조롱

재일 외국인들과 재한 외국인들, 특히 친일파, 와패니즈의 수가 많은 미국 등 서양인들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들이 모이는 인터넷 사이트나 SNS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의 반응에 대해 빈정거리거나 한국을 비난하는 글들을 올리고 있는데 이런 사실은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상황이다.

주로 "일본은 이미 여러 차례 사과했는데 왜 또 난리냐.", "돈 뜯어내려고 또 시작하네."라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한국도 베트남에서 똑같은 짓을 했다는 물타기가 부수적으로 나온다. [[20]]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건 베트남 전쟁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침공이 아니다.[* 실제로 이를 잘못 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에서 있었던 사건들은 절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고, 반 인륜적인 범죄가 일부 군사들로 인해 시간에 걸쳐 일어난건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진보냐 보수를 가리지 않고 김대중 정권부터 단순히 돈으로만 해결하고 과거사 문제를 무조건 부인하는 일본 우익정당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였다. 게다가 많은 한국인들도 이 문제를 단순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살인은 확실히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나 일본에 주재중인 서양인들이 즐겨 찾는 특정 외국어 뉴스 사이트 등지에서는 다른 주제에서는 외국인 입장에서 일본을 중립적, 혹은 비판적으로 보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는데 반해 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 기사만 나오면 한국을 비하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댓글로 도배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는 파키스탄인 와패니즈를 한 학기동안 상대한 [교수의 기고문], [[21]]

일본 레이타쿠 대학의 미국인 조교수 제이슨 모건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은 날조된 것이며 강제납치는 없었고 한국은 양반제도 하에서 어린 소녀를 수세기간 사고 팔던 나라, 위안부는 한국인 포주들이 모집한 것, 진짜 성범죄 피해자들은 소련군에게 당한 일본 여성들이라는 [[22]]을 펼쳤다. 이런 서적과 프로파간다를 일본 우익들이 만드는거니 한일 관계를 모르는 일부 외국인들이 일본 편을 드는게 가장 큰 문제다.

부정파

일본 정부의 공식 인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과 극렬 보수파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위안부의 정부개입 부정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절대 다수가 아니며 정부의 공식 입장도 아니다. 다만 언론의 특성상 이러한 반대하는 입장이 한국에서 더 크게 이슈화가 되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주류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반일국가인 우리나라의 매스컴이 의도적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국민들은 일본 국민보다 감정적으로 쉽게 대응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반일적 사상을 제외하고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오프라인/일반인 여론은 아직까진 극우가 다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인터넷 여론은 극우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 2010년대 이후로 일본의 인터넷 환경은 "자국 혐오자들과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장악 당한 한국의 인터넷 환경"과 달리 사실상 일본 극우와 혐한들에게 장악당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혐한/일본 참조. ] 일본어 위키백과가 모든 네티즌이 이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극우, 혐한적인 내용만 가득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거기다 일본 위키 이용자들 대다수가 이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한국에서는 오프라인 여론에 대해 파악하기는 힘드니 인터넷 여론을 좀 더 면밀히 볼 수 밖에 없는데 '그' 인터넷 여론이 극우들에게 잠식당한 상황이라면? 일본 여론 중 극우 여론이 소수네, 뭐네 해봤자 보이는 것은 극우가 대부분인지라 혐일 여론 형성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요즘은 일본 내에서도 왜곡된 역사 교육이 전면적으로 퍼지면서 일본 국민들도 한일문제에 대해 감정이 없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의 이런 감정이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만은 아니고 오히려 90년대 이후의 정치 상황과 한국과 중국의 일본 적대시에 대한 반발심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생각해보라. 젊은 세대들에게 이 문제는 거의 증조할아버지뻘들의 범죄다.(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일본의 역사문제를 그저 증조할아버지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거 자체가 일본의 잘못된 역사교육의 증거라고도 할수있다.) 오히려 일본의 올바른 시민 사회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식민지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일본에서의 위안부의 軍개입설 및 책임/배상론에 반대하는 입장은 크게 3가지로서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다이쇼 말년부터 쇼와 연간에 내지에서는 실지로 아버지가 딸을 팔거나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성노예 문제도 이러한 사례로 파악하는 이론.],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피해배상의 근거가 없다 등으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발적 참여의 근거로는 여성들의 서명이 담긴 문서와 일본 여성 참여의 증거 등이 있는데 끌려온 여성들의 대부분은 글도 쓸 줄 모르는 경우가 많은 데다 취업 서류로 알고서 서명했다가 끌려간 경우라는 증언들로 볼 때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자발적으로 참가했다는 말이 사실이더라도 위안부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위는 정상적인 한도를 넘어선 수준이었으므로 이 역시도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일본은 '위안부가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법적인 모집이 없었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여 불법적인 위안부 모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이걸 모르고 일본은 위안부는 없다라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다른 루트로 동원된 경우에는 서류상으로 남은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일본에서 보상해준 건 정상적인 루트로 동원된 경우 만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대가론의 경우 일단 위안부에 대한 대가가 지급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단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지불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만인과 조선인에 대해서는 실제 지불된 사례가 사실상 없다. 물론 제대로 지불한 곳은 있긴 있다만 대개 일본군/인물 문서의 정상인 문단에 있는 사람 한정이다. 일본인에게 지불된 것이 확인된 사례도 전쟁 중에 위안부 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하면서 그간의 화대를 정산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 확인된 위안부 명단상 전시에 화대를 정산받고 귀국할 수 있었던 조선인 및 대만인 위안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중국인은 일부 확인되었다는 일본측 주장이 있으나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현지에서는 대부분 일본군 군표로 지급되었는데 패전한 군대의 군표가 어떤 가치를 지닐지는...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물론 현금 교환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8월 7일 새로 공개된 자료에서 조선인 위안부에게도 대가가 지불되었고 본국에 송금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미묘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출된 강제성과 인권유린의 경우는 별개로 논의해야 할 사항이다.

당시 여러 기록이나 증언들을 보자면 위안부의 징집 절차에는 친일조선인이 다수 협력했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이 점이 90년대 한국에서 성노예 관련 조사를 할 때 어른의 사정으로 넘어간 부분이다. 북한의 경우는 '지주와 자본가와 일제의 주구' 를 강조하려고 이 부분을 조사하지만.]

특히 일본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매춘이 합법이었고 이 때문에 조선 안에 적지 않은 매춘업자가 존재해서 이들 중 일부가 일본 당국과 손을 잡고 멀쩡한 조선 처녀를 속여 채용하거나 강제 납치, 전선에 보낸 것도 확인되고 있다. 일본 측 역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당시 종군위안부 조달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협잡의 책임을 업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런 불법적인 일을 자행한 민간 업자들을 일본군이 방치하고 '구매자'가 되었으며, 그렇게 강제 납치된 인원들의 의사에 반하여 일본 당국이 강제로 성노예 일을 시킨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 다만 일본군 개인이 아닌, 그 당시 일본 당국이 위안부가 민간업자들에 의해 불법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입증한다면 사인(민간업자)에 의한 기본권침해행위를 묵인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결국 명확한 일본 정부 내부자료가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이 반복된다.]

즉, 많이 공부하고서 한국 쪽의 불리한 사실도 잘 파악하고 정확한 근거와 자료를 준비해야 일본 보수파 세력의 논리를 뒤엎을 수 있다.

2016년 협상 직후, 디시인사이드 주식 갤러리에서 일본 네티즌 측의 반응을 번역해 올린 글이 있는데, 반응이 하나같이 어이없는 수준이라(...)[* '거짓말도 많이 하면 진짜가 된다'라든가, '우리는 관련 없는데 왜 세금 떼감??'라든가.] 일본을 엄청 까고 있다.

관련 자료에 대한 엇갈린 반응

한 사료에 관한 해석부터 먼저 소개한다.

2013년 8월 7일에 안병직 교수에 의해 당시 조선인 위안부 관리인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이 일기의 저자는 1942년 부산을 출항한 제4위안단 소속으로써 일기 내용과 제 4위안단에 대한 공식 자료가 일치하는 등 신뢰성이 대단히 높은 자료로 확인되었다.

[보도] [보도]

이 자료에 대하여 한국측은 위안소의 운영에 대한 군부의 직접적 개입에 중점을 두며 사실상 일본군이 전면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것에 해설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측은 필자가 위안부에게 부탁을 받고 성행위의 대가로 받아 저금한 액수중 600엔(현재 가치 수천만 원에 해당)을 본국으로 송금하였다고 기술한 내용에 대한 해설과 함께 조직적인 위안부 모집활동은 있었으나 거액을 제시한 업자의 모집행위로 인하여 군이 개입하여 모집할 이유는 없었다는 안병직 교수의 분석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판의 보도에는 안병직 교수가 말한 조직적 모집행위가 있었다는 내용만 있고 뒤의 군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부분은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참고로 안병직 교수는 위안부의 약취, 유인에 대한 일본인과 한국인 포주의 개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군의 조직적 개입보다는 '방관'을 주로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인 할당을 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국측에서는 이 내용을 한국측이 기존에 주장하였던 일본군의 위안부 조직적 동원에 대한 증거로써 취급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측에서는 위안부는 거액의 대가를 받은 창녀들이었으며 업자들이 이런 거액을 대가로 여성을 모집하였다는 기존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본 부정파의 주장

일본 우익은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로 간주하며 모집 과정이 업자에게 일임되어 문제가 있었더라도 그것은 업자와 피해당사자 양자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다만, 정말로 어지간한 인간쓰레기가 아니라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일본의 우익 세력들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나 책임, 혹은 역사적 사실 왜곡 쪽으로 트롤링을 하지 저렇게까지 대놓고 성희롱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 보수파 학자(전 교수다)인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가 1995년 10월 시마네 현에서 개최된 '종전 50주년 기념심포지엄' 에서 말한 내용을 보자.

||종군위안부 문제에 일본군이 관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군이 강제적으로 모았다거나 한 일은 없습니다. 일본군은 지나(중국)에 갔을 때 현지의 여성과 문제를 일으키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매춘업자를 데리고 와도 좋다는 허가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군위안부란 매춘업자가 모은 거에요. 업자가 모집하였다는 사진도 남아있는데 이 업자의 이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위안부를 모은 것은 조선의 매춘알선업자인 것입니다. <이부끼>, 1995년 12월[* <우경화하는 神의 나라>(노 다니엘 저, 랜덤하우스, 2006) P234.].||

새역모를 창설한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전 도쿄대 교수 및 전 타쿠세키대 객원교수는 자신이 쓴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연행' 된 것처럼 사태를 기술하고 있다. 즉, 본인의 자유의사에 반하여 연행되고 노예적으로 구속되었으며 '성적 서비스' 를 강요당한 '섹스 슬레이브(노예)' 로 위안부 여성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심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업자들이 데려와 전지에서 일을 한 것으로 그녀들은 '프로스티튜트(매춘부)' 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즉, 그녀들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 에 종사한 것이다. <오욕의 근현대사>, 39쪽.[* <우경화하는 神의 나라>(노 다니엘 저, 랜덤하우스, 2006) P235.]||

상기 서술하다시피 일본 보수파들은 위안부는 강제 연행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을 한 매춘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이시하라 신타로나 니시무라 신고와 같이 과격한 발언을 일삼는 진짜 보수파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학자' 나 '평론가' 들이 진지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점과 함께 주장을 뒷받침할 기록과 증거, 연구 면에서 단순히 '틀린 소리다'라고만 말할 수 있는 학술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또 1980년대 제주도에서 자신이 여성들을 강제 연행했다고 폭로한 요시다 세이지(요시다 유우토)의 증언이 그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한 꾸며낸 발언인 것이 들통나면서 요시다 증언에 대한 검증하는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친 김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상태이다.[* 국내에서는 작게 이슈화되고 넘어갔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굉장히 이슈화된 사건이다. 또한 요시다 세이지(요시다 유우토)의 증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국내는 물론 한반도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 데 이것이 거짓말로 밝혀지면서 부정파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는 등 일본에서 부정파의 파이가 커지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 부정파의 주장

한국에서 부정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보수논객 지만원은 '최근 TV에서 보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나치게 건강하다', '최근 TV에 나오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연세가 그렇게까지는 많아보이지도 않고 건강도 매우 좋아보이며 목소리에도 활기가 차있는 분' 이라고 주장하면서 매주 수요집회에 나가고 있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위안부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지만원은 "종군위안부 가운데 '진짜 일본군 위안부' 를 가려내는 일이 얼머나 어렵겠느냐" 면서 "종군위안부들이 대개는 '노인이 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한 건 사실이다' 라며 우기는 경우가 많다" 며 위안부를 '일본군 위안부' 와 '종군 위안부', '정신대' 로 구분한 뒤 "진짜 피해를 본 '일본군 위안부' 는 전체 20% 정도이며 어려운 형편에 스스로 성(性)을 판 종군위안부가 80%쯤 된다더라" 고 주장했다.

또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상)' 라는 제목의 글에서 "1944년 당시 15세 이상의 여성이었다면 지금은 최소한 78세 이상이 돼야 하고 현재 몸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게 진짜 할머니의 증언" 이라며 "지난해 11월 일본 대법원에서 6하 윈칙에 따라 확실한 '일본군 위안부' 였다고 인정받은 할머니는 단 1명으로 이 할머니가 인정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는 33명인데 이 가운데 시위에 나가는 할머니는 없다" 고 말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배상 문제를 따지기 전에 위안부들의 부정확한 증언도 지적했다.[* 지만원이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할수 있는 근거는 아시아 여성기금 관련 문제로 위안부 할머니와 정대협간의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지만원이 말한 이 33명의 할머니는 일본의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음으로서 어느정도 문제해결이 되었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는 정대협내부 수뇌부의 의견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으며 돈을 받은 할머니에게 창녀라고 하는 등의 폭언을 가했으며 이에 33명의 할머니들은 정대협이 자신들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운동권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한 조직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무궁화 할머니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대협과 대립하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고 이와중 지만원이 그 33명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어주게 되어 뉴라이트라는 낙인과 함께 철저히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 지만원은 "가짜 위안부가 돈 받고 시위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 [youtube(fC9L2CMZVcA)] || ||<bgcolor=#EEEEEE><:> 뉴라이트 안병직(서울대학교) 위안부 강제연행 부정 ||

안병직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은 한국이고 일본이고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병직은 "일제 시대 정신대는 강제동원이 아닌 자발적 매춘이었다" 라고 [[23]]하여 파문을 일으킨 바가 있었는데 위안부 생존자가 안병직이 특강을 하는 서울 인창고를 찾아가 교문 앞에서 시위 형식으로 통곡하기도 하였다.

현재 안병직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동원을 했다는 책을 [[24]]한 것을 보니 생각이 바뀐듯하다

또한 이들은 1991년 당시 일본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피해보상기금을 제의했으며 대부분의 위안부는 그것을 받아들였으나 오직 현재 수요집회를 주도하는 자들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몇 십억 엔 가량의 규모였고 일본 총리의 사과문이 들어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금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으로 1991년이 아닌 1994년에 총리의 고노 담화로 구체화되었고 1995년에 출범하였다. 이는 일본 총무성과 외무성이 관리하고 일본 정부 예산 약 5억 엔과 일본 국민의 모금 5억 엔을 합친 10억 엔 규모의 법인이었고 배상액은 1인당 2백만 엔 정도였다. 하시모토 당시 일본 총리의 사과문이 포함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 61명이 보상기금을 수락했으며 이들이 '정당한 보상과 사과를 받지 못한 위안부'라는 대중의 인식 속에서 잊혀진 것, 그리고 이들의 입장이 현 위안부 문제를 주도하는 단체들에게 '변절자'로 무시당한다는 지적 자체는 사실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해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이었으며 법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항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시아여성기금' 이란 그런 상황에서 전후청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무라야마 정부가 차선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아시아여성기금은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일본의 진보, 보수 양쪽의 비판을 받으며 사업을 실시했던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자민당 의원의 숫자가 3배나 되는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국회' 를 제치고 '정부'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기금' 이었다. 다시 말해 '기금' 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그 주체가 국회가 아닌 정부였을 뿐이다. -제국의 위안부 中 인용.] 다만 국제 NGO인 엠네스티에서는 '일본이 1995년 설립한 아시아 여성기금은 국제적 배상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며 국제적·법적 책임을 교묘하게 피해가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외에도 여러 국가의 일본군 위안부 출신자들이 이 기금의 수령을 거부한 바 있었고 2007년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은 활동을 종료하고 해체했다. 그러나 반대로 실제 피해자중 61명이 이 기금을 수령한 것, 그리고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박노자 역시도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가지는 민족주의적/(순수한 의미에서의)반일적 모순들을 공격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간략히 평하며 '어쨌든 제가 박유하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해도 일본의 '국민기금' 을 1990년대 후반에 받은 61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난한 국내 시민 단체나 언론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의 주된 비판단체로 나서는 정신대대책협의회의 몇몇 주요 간부가 조총련, 범민련, 조평통등 북한의 대남공작기관과 관련된 종북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단체이며 서술방식이 남한보다는 북한 입맛에 맞게 자극적인 서술방식에 호소한다는 비판점도 있다.[* 이러한 비판점이 반영된 극우언론 기사의 [[25]]. 단 이 극우언론사는 최순실 게이트 이후 극심한 박근혜 옹립 성향을 보이고 있으니 이점은 걸러서 읽을것.] 이는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논거로 많이 써먹지만, 정대협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종북 종양/지능안티'라고 보는 시각은 단순 보수성향의 회의론자 및 ("애국 국까")[* 역사 갤러리참조.][*반론 반론측에서는, 정대협 종북설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주로 주장하는 근거가 남매 간첩단 사건이라고 하는데, 남매 간첩단 사건은 훗날 정부에서 시인한 공안조작사건중 하나라는 점을 들어서 그들의 종북설을 논파하는 역논거로 쓰고 있다. [[26]]. ~~소스가 어째 반대쪽 극단같지만 일단은...~~ ] 들 사이에서도 보이는 주장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서 나온 일본군의 특성이 실제 일본군의 특성과 다르며 헬리콥터 부대의 존재, 지프차 운용, 영어 사용, 크리스마스 풍습, 군복하의에 붙어있는 지퍼, 한국전쟁 광경 거론등을 비롯한 기술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10~20년 차이가 나는데다 미군의 특성이며 몇몇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에서 나온 일본군의 특성이 실제 일본군(예를 들면 일본군은 군복 특히 하의에 지퍼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추를 사용했고 영어는 적성국의 언어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과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2차세계대전 당시~한국전쟁까지의 미군을 가르키고 있다는 것과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연도에 대한 증언의 고증오류(동남아시아가 일본에 점령된 연도가 1940년대인데 1930년대에 동남아시아로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증언)를 지적하는 내용의 [있다.][*17 단, 해당 블로그가 증언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해도 그것이 모든 증언이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가 없다는 반증이 된다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실제로 여러 증언들 중에서 일관성 있고 반증이 부족한 증언들은 신뢰성이 있어 위안부 실태의 증거들 중 하나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해당 블로그 자체가 전형적인 일뽕+극우 성향을 보이는 블로그이니 열람시 주의를 요한다. 참고로 해당 블로그의 주인은 현 역사 갤러리의 거의 사상적 지주급인 사람이다.]

그외에도 상술했듯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제와 다르게 과격한 쪽으로 번복되거나 부정확하고 고증에 맞지 않는 증언, 한국인 위안부 관련 국내 기록의 부재, 위안부 관련단체와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한국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 이용[* 위안부 관련단체에서는 법적배상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민족주의자들은 반일감정을 이유로, 한국정부는 국면전환용으로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정부가 은폐한 한일기본조약을 인지함,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국내단체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인지함, 일본에 대한 위안부 문제제기의 배후에 종북주의자와 북한 정부 및 더 나아가 배후에 친중과 중국 공산당, 친러와 러시아 정부가 선동하고 있다는 반북중러감정등으로 위안부 문제 부정파가 되는 사례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북한의 경우 남남갈등과 남한의 정통성 폄하를 목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 한미일동맹을 분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부정파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위안부 문제제기가 마치 국내 종북세력이나 반서방독재국가의 정치적 음모로 치환하는 것도 문제고 이것이 어느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특정세력이 위안부 사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난징대학살을 다루는 중국정부의 행동을 보면 일본군의 만행에 치를 떠는 제 3자가 보더라도 공산당의 프로파간다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고 시대의 아픔을 본인들의 정치적모순(일당독재)을 가리는 곳에 쓰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난징대학살 부정파의 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이후에 그간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공격해왔던 관행에서 벗어나 일부 극단적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부정파가 등장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간 적어도 정치권에서는 진보 보수 할 것없이 모두가 이득인 문제였지만 합의 이후로 조금씩 변화할 여지가 보인다. 이것은 향후 한국의 부정파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박근혜 탄핵 이후 범보수세력에서 위안부 합의를 잘못된 합의로 여기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대선후보도 파기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다시 예전의 국공합작(?)으로 돌아갈 경향도 있다.

역사학자들의 공개서명 움직임

최근 주목할만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데, 2015년 5월 6일 전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모여 '일본의 역사가들을 지지하는 공개서한'이라는 성명서를 [[27]]. 이 성명서는 일본아베 신조 총리에게 보내진 이후 국내 연합뉴스연합뉴스TV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이 집단성명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학자 187명의 서명이 들어가있으며,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특이할 점은 이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학자들 중 일부는 일본 근·현대사를 다룬 연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 정부가 수여한 상을 받은 학자들도 다수 포함되어있다는 것. 더불어 단순히 일회성에 그친 일이 아니라 참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있다!] 2주가 지난 19일에 집계된 학자들은 456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추가 성명에 참여한 이들은 일본학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이안 브루마, 독일 일본학연구소(DIJ)의 프란츠 발덴베르그,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세바스찬 르셰발리에, 미국 코넬대의 사카이 나오키 등이다. 6일에 발표된 성명서를 미국과 호주의 학자들이 이끌었다면, 이번에 참여한 학자들은 주로 유럽과 일본의 학자들이다. 집단성명에 참여한 학자들의 전공도 역사학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학, 인류학, 문학, 종교 등 다양해지고 있으며, 지역별로도 미국과 유럽, 일본, 호주, 남미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학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역사상 유래없는 일인만큼 일본 정부와 아베 총리에게 상당한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 집단성명의 취지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했다는 일본 언론의 견해가 존재한다. [[28]] [* 해당 기사는 한국 언론이 성명서 취지와 내용을 왜곡 보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언론이 지적한 한국 언론의 왜곡 보도 문제는 실제 연합뉴스의 보도 내용과 교차검증시 일본 언론의 '왜곡 주장'에 오류가 있으며[일본의 일부 언론이 '일본군, 위안소 관여'의 내용을 제외하고 보도하고 있다.] ]

이 언론에 따르면, 이번 집단성명은 일본 정부아베 신조 총리를 향한 정치적인 압박, 요구보다는 요청에 가까우며 아베 총리의 美 의회 연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명서 어디에도 평소 한국 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비참한 야만 행위', '성노예', '희생'이라는 말이 없으며 집단성명의 의미는 평화나 인권·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해 온 일본이 문제의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는 게 성명서의 의미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알렉시스 더든 교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번 성명은 일본 내에서 위안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일부 정치인들과 여론주도층에 의해 공개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데 대한 집단적이고 깊은 우려를 보여주는 게 주된 목적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아베 정권에게 과거 고노 담화 때처럼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역사 왜곡이나 정치 쟁점화를 하지 말라는 직접적 호소를 보낸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 알렉시스 더든교수는 지난 [6일 미국역사협회에(AHA) 소속된 역사학자 19명의 집단성명]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이번 5월 6일 187명의 집단성명에도 참여한 학자이다. 연합뉴스는 더든 교수가 이번 집단성명을 주도한 교수라 표현하고 있는데 일본언론은 더든교수는 이번 집단성명서에 34번째로 서명한 교수로써 집단성명의 내용을 주도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녀의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이기 때문에 이번 성명에 담아진 연구자의 총의를 대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더든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자신의 개인적 생각이라고 발언한 적이 없다. 그녀가 이번 성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그녀의 성명에 대한 발언이 무조건 개인적인 생각으로 치부될 수 없으며 만약 더든 교수의 생각과 성명의 의미가 빗나간 것이었다면 항의하는 이가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없다. 사실상 일본 언론이 주장하는 것도 추측에 불과하다. 애초에 성명 자체가 일본의 역사의식을 지적하고 있는데 일본에 권고를 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명확히 과거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항의의 뜻이 담겨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번 집단성명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자들을 의도적으로 제외하는 과정이 있었다. 최종 결과물인 집단성명을 어떻게 해석할 지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자.

5ch(전 2ch)의 반응

아니나다를까 자기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2ch에서 특히나 혐한여론이 심한 곳(동아시아뉴스+판, 한글게시판, 니다게시판의 '혐한 트로이카'로 대변되는)은 잠자리에 끌여들인 주제에 자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꽃뱀이라는 사과는커녕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태도를 보여 천하의 쓰레기들임을 인증했다.

위안부 문제에서 소외된 피해자들

위안부 문제에서 기업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한국정부의 위안부, 양공주 참고.

관련 미디어

1991년에 개봉한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처음으로 다룬 영화이지만 흥행과 비평은 참혹했다. 영화상 조센삐는 조선 여자를 낮춰 부르던 일본군들 은어인데 당시에는 정신대라고 불렀기에 정신대로 나온다. 하지만 감독인 지영호는 고금소총 시리즈같은 에로물 전문 감독이었으니...

1995년에 놀랍게도 일본 현지에서 거짓말쟁이 여자, 영자라는 무대가 올라왔었는데, 순수하게 일본인 스태프로 구성된 작품인데, 왜곡 하나 없이 위안부에 대해 정확하게 내용을 그리고 있어서 양심작으로 남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여러 번 상영되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무대의 조명감독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성우인 스즈무라 켄이치의 장인어른이자, 사카모토 마아야의 친아버지인 사카모토 요시미 씨.

파일:external/ph.mediatoday.co.kr/116526_129635_4259.jpg 1995년, 1997년, 1999년에 3편까지 나온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실제 피해 여성들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비평은 좋았지만 셋다 전국관객이 1만명도 못될 정도로 흥행은 그리 거두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몇몇 소규모 제한 상영관에서 개봉했는데 극우 단체들이 소화기를 뿌리고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었다.

그리고 2016년 개봉한 귀향이 위안부 문제와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관심도를 가지게 되었다.

또 1년 뒤인 2017년에 위안부 관련 영화로 아이 캔 스피크가, 2년 뒤인 2018년 6월 허스토리가 개봉했다.

[위안부 문제 알리는 프랑스인…"피해여성 돕고 싶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열릴 예정인 한 위안부 소재 영화의 상영회를 앞두고 일본 극우 인사들이 상영회를 후원하는 지자체에 집단으로 항의를 하며 조직적으로 방해를 하고있었 논란이 되고있다. [소재 영화 상영회에 日극우들 '항의 테러'] 참고로 해당 위안부 영화는 재일교포 2세 박수남 감독이 연출한 '침묵'이라고 한다.

기타

*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 이전에 1975년 10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힌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다가 2018년에 들어서서 조명되고 있다.[[29]]
* 일본에서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로. 이 기사로 자신은 물론 딸의 신상까지 털었다. 게다가 대학교수 임용도 막혔다고 한다. 다행히 현재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로 활동중이다. 최근 자신의 경험 바탕으로 책을 냈다. [[30]]
* 2004년에는 네띠앙이 연예인 이승연과 계약을 맺고 위안부 컨셉으로 누드화보를 찍어서 상상 이상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승연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며칠 후 바로 네띠앙에서 촬영 강행을 선언하며[* 물론 "불순한 의도는 절대 없으며 이번에도 비판받는다면 화보자료를 전량 폐기하겠다" 라고 실드는 대충 친 상태에서. 그리고 1년 후 네띠앙은 천벌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네띠앙 문서 참조.] 다시 한 번 비난받았다.
* 김영삼 정부는 [원치 않지만 진실을 꼭 밝혀야 한다]고 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 일본은 그 외에도 패전 직후 주일미군을 위해 또 위안소를 만들었다가 미군에게 대차게 까이고 폐쇄하는 병크를 저지른 바 있다.
* 일본에서는 종종 "군대에 여자가 붙는 것은 당연한 속성"이라면서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덜 속셈으로, 미군의 성범죄/매춘 통계나 한국전쟁 당시 양공주한국군 위안부, 혹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 생겨난 한국-남베트남 혼혈인 라이따이한등을 예시로 들며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한다. [1], [2]. 위안부 문제는 일본만이 저지른 잔악행위가 아니라 전쟁이면 으레 생기는 비극이라는 논리.
* 12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이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군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을 일본 정부에 거듭 촉구했다. [대통령 "日 군대 위안부 해결 용기 가져야"]
* 위안부 문제 때문에 일본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아베 신조 총리가 삽질을 거하게 푸고 총리 취임 1년도 안 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2012년 [총리가 되어 망언을 일삼고 있다].
* 2012년 1월 8일 주한 일본 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중국인 류창이 검거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할머니가 일본 때문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 위안부였으며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신사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징역 10개월의 형기를 마치자 일본 정부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에 방화한 죄는 일본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며 일본으로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고 중국 정부에서는 그가 일본에서 정치범으로 처벌받을 상황을 우려하여 중국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정부는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중국으로 송환했다.
* 2012년 5월 5일. [여성 인권 박물관'이 서대문구에 개관되었다]. 당초엔 서대문구의 독립공원 내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 독립 유공자 단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광복회의 반발 내용을 요약하면 "순국 사실로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주 목적이 되는 독립공원에 일본에게 별 항거 없이 끌려갔다는 내용의 사료를 전시하려는 박물관은 성격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는 이야기다. 일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광복회 등 독립 유공자 단체가 내세운 의견은 당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 또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 방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 2012년 6월 9일,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공관의 존엄침해 금지를 정한 빈 조약에 저촉된다는 공식 견해를 발표했다].
* 2012년 6월 18일, 21일에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이 위안부 평화비 앞에서 [일본땅' 이라고 쓴 말뚝을 박고 동영상을 찍었다]. 말뚝을 설치한 사람은 극우일본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로 밝혀졌다. 문제는 [경찰이 말뚝을 설치하는 만행을 하는 동안 방관하고 있었고] 처벌하려 해도 스즈키는 이미 일본으로 튀어버려 수사도 힘든 상태라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말뚝테러 사건 문서 참조.
* 2012년 7월 8일,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위안부(comfort women)' 라는 표현 대신 '강제적인 일본군 성 노예(enforced sex slaves)' 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12년 8월 9일, KBS 드라마 《각시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묘사하였다. 관동군의 요청을 받아 간호부 모집으로 속여 조선인을 총독부가 조직적으로 모집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개입을 했음에도 민간업자를 위장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뒤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한 적 없다라고 주장하면 된다' 라는 내용을 담아 현재의 일본 상황을 비판하였다.
* 2013년 3월 1일을 앞두고 [노래]가 나눔의 집에 배달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유튜브 측에서 규정 위반으로 삭제한 상태. [[31]], [[32]], [[33]], [[34]], [[35]]

종편 채널 a가 이 사건에 대해서 취재했다. 앵난무류(스크램블)이란 인디 밴드 작품이며 일본 현지에까지 가서 취재했지만 끝내 인터뷰에 응하진 않았다. 그리고 일본 현지에서도 평이 좋지 않다. 동영상에서 인터뷰한 일본 여성이 말한 대로 나라 사이의 문제를 떠나서 노골적인 폭언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는 근본적으로 여성의 가치를 심하게 말하자면 오나홀 정도로 떨어뜨리는 비인간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위안부 제도로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던 서양인들도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 2013년 5월 21일, UN CESCR(사회권 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내 혐한파의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 대한 모욕을 막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 2013년 9월 2일, 2012년도에 당시 집권당이었던 일본 민주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인 사과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위안부 문제 합의 직전까지 갔었다”] 주 내용은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 정부를 대표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노다 총리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인도적 지원 조치를 설명하며, 보상금 등 인도적 지원은 100% 일본 정부 자금으로 충당한다는 3가지 방안이었으나 이명박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당초 위안부들에게 배상의 목적으로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이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를 위한 꼼수라는 비판을 들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직접 배상을 목표로 추진한 것. 다만 일본 정부"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법적 배상 책임은 종료하였다는 입장은 유지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직접 배상하는 것인 만큼 실질적인 배상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안부 지원단체와 외교통상부는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며 반대하였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하여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자민당이 집권하게 되자 일본의 사과 계획도 물 건너갔다. 이에 대해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센터 소장은 "양쪽에서 좀 더 신중히 검토하였어야 했다, 일본도 자민당이 사과 계획을 세울 리 없고 한국도 그때보다 사과 요구 수준을 높인 만큼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졌다"며 안타깝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사] 하지만 저 당시 일본측이 제의한 '사사에안'은 박근혜 정부 시절 합의된 한일 위안부 합의 보다도 세부적인 내용에서 격이 더 낮은 합의안으로 일본 총리도 아닌 주한 일본 대사가 일본 정부를 대표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한다는 부분만 봐도 격이 많이 낮은 사죄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박근혜 정부 시절 맺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는 아베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일본 정부를 대표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이라고 사죄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저 당시 이명박 정부가 '사사에안'에 맞춰서 한일간의 위안부 합의를 타결 했다면 현재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상으로 엄청난 비난과 전국민적인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 프랑스 앙굴렘 만화제에서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기획전 부스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거절당하고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한 만화부스를 철거 당했다. [만화 '관심과 지지'. 일본 작품은 '철거' / YTN] [* 프랑스영국, 독일과 함께 유럽을 이끌어가는 국가이자 일본과 더불어 G8의 멤버이기도 하다. 당연히 일본의 이런 압력이 불쾌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저 부스는 일본 극우지인 WiLL이 후원하기도 했으며 참여 삽화가중에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작화담당으로 알려진 사토 후미야도 있다.]
* 와패니즈들의 활약 덕분에 유튜브 등의 서양권 사이트에서 토니 마라노의 소녀상 조롱 동영상 등 일본의 의견을 지지하는 동영상이나 자료가 큰 지지를 받고 추천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괴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 댓글에도 피해자들한테 성적인 모욕을 내뱉고 이에 반박하는 한국 네티즌들에게 증거가 없다는 등, 일본 네티즌들이 오히려 정확한 증거들 들고 온다는 등 일본 측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판치고 있다. 
*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를 외면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장 포괄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곳은 와세다에 위치한 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박물관)이 있다. [[36]] 학예원인 와타나베 미나는 일본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 시키고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평.
* 2015년 2월 28일과 3월 1일, 2회에 걸쳐 KBS 1TV에서 8.15 광복 70년 특집극 눈길을 방영하였다. 1944년 어느날, 15살 소녀 최종분(김향기)과 강영애(김새론)가 만주 지역 위안소로 끌려가 그 곳에서 겪는 처참한 광경을 담고 있다. 직접적인 겁탈하는 장면은 제하고, 그 외에 여러 위안부들이 겪었을 만한 내용들이 극 중에서 전개되어 간다.[* 임신을 하지 못하게 약을 먹이고, 썼던 콘돔들을 위안부들이 직접 세척한다. 성병에 걸려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겨진 위안부를 즉결총살하고, 급기야 전황이 불리해져 진영 철수 시 조선인 위안부들을 전부 총살시키고 증거를 파기하는 등 적나라할 수 있는 내용들을 영상에 담고 있다.] 거기에 아역배우로는 정평이 난 김새론과 김향기가 열연을 하여 한층 더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러한 과거의 소녀들의 모습이 현재의 나이 든 최종분(김영옥)과 교차되어 살아남은 그녀의 삶과 애환을 보여준다.
* 일본의 한 그래픽 디자이너 [다이]가 위안부 소녀상을 조롱하는 "Sexy Lady"라는 이미지를 올렸다. # (주의)굉장히 성적이고 혐오스러우며 모욕스럽다.

* 2015년 6월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한 고등학교의 어느 동아리는 위안부 피해자 어르신 분들의 뜻을 기리고 응원하고자 하는 의도와 동시에 아베 신조 총리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의미에서 전교 학생들이 다같이 주한 일본 대사관에 자필 엽서를 보내는 과감한 캠페인을 열었다.
* 2016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2007년도 우승자인 일본의 모리 리요(森理世)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모리는 한국 대표 김제니#s-2에게 한 질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여성인권과 권리증진을 표방하고 있는 국제대회에서 민감한 정치외교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는 행위는, 떨어뜨리려고 한 질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심사위원이 이해당사국 출신이란 점 때문에, 위압적인 분위기까지 연출되었다고. 이에 대해 모리는 "어떤 인종으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을지 모르는 거니까,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가 심사 포인트"라는 망언을 했다.
* 2016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손글씨로 만든 폰트]가 나와서 무료배포되고 있다.
* 2016년부터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8월 14일 즈음 개최되는 홈경기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행사를 [[37]] 이어서 201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4일을 위안부 기림일로서 공식 지정한 것을 기념하여 새로운 유니폼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위안부 평화비

평화의 소녀상 관련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할 것.

국내에서는 2012년 공주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서명운동과 모금활동을 통해 최초의 [추모비를 건립]했다. [거제에도 세울 계획]이 있다. 그리고 통영에 건립 계획이 [[38]]되었다.

해외의 경우 [[39]]에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섬에 세워진 것을 시초로 2010년 10월에 뉴저지 주 팰리세이즈파크에 미국 최초의 위안부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2012년 6월 21일에는 미국 뉴욕에서 위안부 추모비가 [[40]]되었다.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측은 위안부 기념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 일본 대표들과 뉴욕일본총영사관에서 팰리세이즈시 정부에 위안부 동상을 철거하면 일본 정부가 그 대가로 도서관 서적 기증, 벚꽃길 조성 청소년 교류 추진 등을 지원하겠다는 [[41]]을 했으나 이는 거절되었으며 시 정부는 숭고한 위안부 기념상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극우성향의 재미 일본인(+일본 극우사관에 찬동하는 친일 미국인 약간)들은 이를 철거하라고 계속 로비 공작을 벌여왔는데 심지어 2012년 6월 9일에 [청원까지 넣는 일이 발생했다]. 해당 청원의 일본인 서명자는 32,000여 명. 이에 대해 한국측에서도 추모비의 존속을 요구하는 청원을 넣었으나 청원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25,000명의 서명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측 청원 서명자의 반에도 못 미치는 14,000명의 서명만을 받고 2012년 7월 14일 00시부로 한국측 청원은 한국인의 무관심 속에 조용히 기각되었다.

다행인 것은 이 무식한 일본 우익들은 뉴저지나 뉴욕 주정부도 아닌 백악관에 청원을 넣었다는 일이다. 미국은 연방제 특성상 일본이나 한국과는 전혀 다르게 주 정부와 연방정부가 명목상 동일한 위치에 있으므로 설령 백악관이 갑자기 미쳐서 이 청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주 정부들에게 철거를 요구할 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헌법 특성상 주 정부가 그런 미친 요구를 수용할 일도 없다]. 이전의 이 문서에는 저 청원 때문에 위안부 추모비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그럴 일은 없다.

이것은 우익 일본인들이 주동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위안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이제까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많이 노력해왔다는 것을 미국에 인지시키는 것이다. 노다 요시히코 前 총리 역시 이렇게 발언했다. [[42]].

여기에 대해서는 진짜 사과라는 의견도 있고 최근까지도 일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의 반응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의 하원의원장에게까지 로비를 하는 것으로 드러나 일본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이 일을 막으려는지 알 수 있다. 사실이 아니라면 이렇게 필사적이진 않을거다.

201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2016년 6월에 위안부 기록물 2,744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상황이다. 2017년 10월 말에 파리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현재 일본은 이에 대응하여 유네스코를 압박, 세계기록유산 새 심사안을 가결시켰고[[43]] IAC 의장에게 심사연기를 요청한 상태이다.[[44]]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워낙 핫한 사안인지라 다른 등재 신청 후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비공식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유네스코에 같이 올라간 다른 3건[* 조선통신사 기록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을 모두 합친 것의 몇 배에 이르는 지원을 받고 있다고.[* 원래 세계기록유산은 공공기관이 아닌 시민단체에서 주관하여 등재신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정부 쪽의 공식 지원은 해당 기록물 소장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조금씩 지원하는 정도이지만 이 위안부 기록물만은 워낙 특별한 사안이라 정부(문화재청, 외교부 등)와 유네스코 한국지부 등에서 대놓고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다고 한다.]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의 공격 또한 가장 심하게 받고 있다.

2017년 10월 27일 일본 NHK에서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가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심사를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올라왔다.[[45]], [[46]] 다만 NHK의 추정으로 아직 유네스코의 공식 발표는 없다.

2017년 10월 31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가 공식적으로 보류되었다.

얼마나 일본이 집요했는지 심사위원들 공짜여행까지 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47]] 그러나 불법은 아니라고 한다.[* 애초에 국제기구의 중심은 미국과 일본이 이끌고 있다. 그래서 제3세계 국가들이 이러한 형태에 불만이 제일 컸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이 세계은행을 대항하기 위해 AIIB을 만든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위안부 조직적 동원' 日記 나왔다]
* [위안부 증거 첫 공개... 들통난 아베의 거짓]
* [국립공문서관,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 공개]
* [뉴스)美, 2000년대 초 “군 위안부 조직적 프로그램” 결론]
* [로펌 동원해 美하원의장에 까지 '군대 위안부' 로비]
* [전문 미국 교과서가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일본 총리]
* [위안부 강제 동원” 문서 다수 존재]
* [(조선일보)일본 "위안부 연행 증거없다"지만 자국 문서엔 '연행' 언급  ]
* [|(세계일보)“日,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 없다는 건 궤변… 전면 책임 물어야”]
* [|(동아일보)일본 4대 역사단체 “日 안팎에 위안부 진실 알릴 것”]
* [|(연합뉴스)日정부 "軍위안부 강제연행 증거없다" 또 주장]
* [해결’ 약속 지킨 朴대통령… 여론 달래기 부담 안아]

관련 문서

*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논란
* 귀향(영화)
*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 나눔의 집
*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 - 대부분의 미투운동 지지자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미투 운동의 시작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 박유하 : 시오노 나나미와 비슷한 맥락의 ~~감상팔이적~~ 발언을 하였다.
* 사카이 사부로#s-4 -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한 것을 비롯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 서기석
* 수요집회
* "성노예" 
* 시오노 나나미 - "위안부란 이름은 상냥한 이름"이라는, 개념상실한 피해자 비하발언을 했다.
* 아시아여성기금
* 아이 캔 스피크
* 원죄
* 위안부 평화비
* 이승연 위안부 누드 사건
* 인덕대학교 일본어과 사건
* 일본군
* 일본 우익사관
* 일본 우익사관/학자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제강점기
* 일제 강제동원 피해 기록물
* 전범
* 조센삐 -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가르키는 속어이자 비하어.
* 태평양 전쟁
* 한국군 위안부
* 힐러리 클린턴: 위안부에 대해 강제적인 성노예임을 명확하게 표현한 인물이다. [단독 보도]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위안부 문제,version=677)]

분류:일제강점기 분류:제2차 세계 대전/전쟁범죄 분류:중일전쟁 분류:태평양 전쟁 분류:일본군분류:인권 침해분류:성범죄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