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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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right><#ffffff><:> {{{#b0313f {{{+1 대일본제국[br] 大日本帝国}}}}}} || ||||<:><-2><#fff> width=140 ||||<width=50%><#fff><:> width=100 || ||<-2><#ffffff><width=50%><:> 국기 ||||<-2><#ffffff><:> 국장 || ||<-4><#ffffff><:> width=250 || ||<-4><#ffffff><:> 1868 ~ 1945(1947)[* 법적으로는 ~1947년. 평화헌법을 제정한 이 시기가 제국의 종결로 봐야 한다.] || ||<width=25%><#ffffff><:> 국가 ||||||<#ffffff>기미가요 || ||<#ffffff><:> 위치 ||||||<#ffffff>일본 열도,,,(1868),,,쿠릴 열도,,,(1875),,,오가사와라 제도,,,(1876),,, 류큐 제도,,,(1879),,,타이완 섬,,,(1895),,, 사할린남부,,,(1905),,,한반도,,,(1910),,,미크로네시아 일대,,,(1914),,,만주,,,(1932),,, 내몽골,,,(1936),,,중국 동부 일대,,,(1937),,,동남아 일대,,,(1940),,, · 서태평양 일대,,,(1941),,,|| ||<#ffffff><:> 수도 ||||||<#ffffff>에도도쿄부 (1869년)[* 칙서 '江戸ヲ称シテ東京ト為スノ詔書'에 따른 개칭.] || ||<#ffffff><:> 면적 ||||||<#ffffff>1,984,000 km2 (1938년) || ||<#ffffff><:> 인구 ||||||<#ffffff>97,700,000 명 (1935년) || ||<#ffffff><:> 정치 체제 ||||||<#ffffff>전제군주제[br]→입헌군주제[br]→군사독재 · 익찬 체제 || ||<#ffffff><:> 국가 원수 ||||||<#ffffff>천황 || ||<#ffffff><:> 역대 천황 ||||||<#ffffff>메이지 덴노,,,(1868~1912),,,[br]다이쇼 덴노,,,(1912~1926),,,[br]쇼와 덴노,,,(1926~1945),,, || ||<#ffffff><:> 정부 수반 ||||||<#ffffff>내각총리대신 || ||<#ffffff><:> 주요 내각[br]총리 대신 ||||||<#ffffff>이토 히로부미[br]가쓰라 타로[br]다나카 기이치[br]고노에 후미마로[br]도조 히데키[br]고이소 구니아키[br]스즈키 간타로 || ||<#ffffff><:> 언어 ||||||<#ffffff>일본어 || ||<#ffffff><:> 국교 ||||||<#ffffff>국가신토,,,(사실상)[* 표면적으로는 제국 헌법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니라고 천명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종교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 불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요되었다. 이는 도쿄대학 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야나가와 케이이치(柳川啓一)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가신토 항목 참조.],,, || ||<#ffffff><:> 주요 사건 ||||||<#ffffff>1868년 메이지 유신[br]1879년 류큐 강제 병합 [br]1890년 일본제국헌법 제정[br]1895년 타이완 병합[br]1905년 사할린 남부 병합[br]1910년 대한제국 강제 병합[br]1931년 만주국 정권 수립[br]1937년 중일전쟁 발발[br]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br]1945년 연합국에 항복 [br]→제정 해체[br]포츠담 선언[br](1947년 일본국 헌법 발효) || ||<#ffffff><:> 통화 ||||||<#ffffff>(¥) || ||<#ffffff><:> 성립 이전 ||||||<#ffffff>에도 막부(시코쿠, 규슈, 혼슈)[br]에조 공화국(홋카이도)[br]류큐 왕국(류큐 제도) || ||<#ffffff><:> 멸망 이후 ||||||<#ffffff>연합군의 군정[* 일본 이외에 식민 지배를 당했던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동음이의어) 문서의 각 항목 참고.](일본 열도)[br]류큐 열도 미국군정부(류큐 제도)[br]미군정(한반도 38도선이남)[br]소련군정(한반도 38도선이북)[br]중화민국의 만주외 영토반환[br]소련의 사할린남부[br]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 || ||<#ffffff><:> 오늘날 ||||||<#ffffff>{{{#!folding [ 점령지 독립국 ] 대한민국(한반도 남부)[br]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반도 북부)[br]대만[br]베트남[br]캄보디아[br] 라오스[br]미얀마[br]말레이시아[br]싱가포르[br]브루나이[br]필리핀[br]인도네시아[br]동티모르[br]파푸아뉴기니[br]미크로네시아 연방[br]마셜 제도[br]팔라우[br]나우루[br]키리바시[br]솔로몬[br]바누아투}}} {{{#!folding [ 점령지 영토반환 ] 중화인민공화국(만주, 동부 해안 등)[br]러시아(쿠릴 열도와 남사할린)[br]인도(동부 일부분)[br]미국(, 북마리아나 제도 등)}}} || [목차] [include(틀:-)]

개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중반 일본 열도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1867년의 대정봉환을 통해 덴노에게 정권이 이양된 지 약 1년 후인 1868년에 메이지 유신으로 건국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20년 가량 지난 1889년 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국가 기틀이 완전히 마련된다. 그리고 건국 후 약 70년 가량 지난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덴노와 정부가 종속되어 사실상 멸망했으며, 일본국 헌법이 제정된 1947년에 법적으로도 완전히 소멸한다.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근대화[*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산업, 경제 등의 외형적인 근대화는 성공적이었으나 정신적인 의미의 근대화는 미비하였다. 1880년대와 1920년대의 자유 민권 운동과 다이쇼 민주주의는 모두 어정쩡하게 끝났으며, 1930년대에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인권 의식, 개인주의 등은 제국 패망 이후 연합군의 통치를 거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발전한다.]를 이루어 열강의 반열에 들었고, 한때는 동아시아 전체의 발전 모델이었던 국가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과 대만, 만주를 포함한 다양한 식민지의 주권을 탈취하고 그 주민들을 착취했던 제국주의식민제국이었고,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군국주의 파시즘[* 일제가 파시즘 국가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당시 집권 세력인 군부가 민주적 절차에 따른 대중적 지지를 얻고 당선되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고.] 전범 국가이기도 하다. 그 망령은 망한 지 70년이 넘어가는 현재까지도 동아시아 각국의 사회에 남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약칭은 일제(日帝)로, 제국주의기의 일본 또는 일본의 제국주의 혹은 제국주의 세력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일제라는 말은, 일본 내에서는 주로 좌익들이 쓰고 우익들은 이 말에 반감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 약칭을 잘 모른다. '비꼬는 의미에서' 대 일본 제국이라는 풀 네임을 말하거나 그냥 일본이라고도 부른다. ~~누구의 뇌피셜인가..~~반면 한국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처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 제국은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여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라고 칭했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이라는 표기를 고수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고대 로마의 경우 왕정이었을 때를 로마 왕국, 공화정일 때를 로마 공화국, 제정이면 로마 제국이라고 하듯이 제정 일본(Japanese Empire)[* 대한 제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Empire of Dai han 또는 Greater Korean Empire을 표방했으나 역시 Korean Empire로 통용되었다.]을 일본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맞는 표기다. 또, 한 언어에서 고유 명사를 어떻게 부를지는 언어의 사회성에 근거하여 도의적 합의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점도 고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들어 한국이 자국의 명칭을 기존의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높여 표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나라들은 '대한민국'이란 명칭 표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 집권기 나치 독일을 당시의 정식 명칭인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이라는 칭호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의 모토를 '5개조 서약문(五箇条の御誓文)'[* 일본어로는 '고카죠노 고세이몬'이라고 읽는데, (신령 앞에서) 맹세하는 5가지 서약문이라는 뜻이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1868년 막부 대정봉환을 하자 메이지 천황이 천지신명 앞에서 선서하는 형식으로 반포한 기본 방침이므로 표어로 볼 수 없다.

최대 판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_Empire2.png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다만 해석에 따라 지도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연합국 소속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태국은 비록 일제의 공격에 항복하였긴 하나,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서 협조하는 대신 국가 체체를 유지하는 선에서 끝나서 상황이 다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불가리아루마니아, 헝가리북유럽덴마크도 제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유럽 전역이 거의 사실상 나치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던 만큼 나치 독일의 점령국으로 봐야 한다.[*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추축국에 끌려갔고 나치 독일로부터 독일군 주둔지, 점령지 수준의 차별 대우를 받았던 불가리아와 달리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 시기에 전쟁터에서 학살도 저지르고 당시 지도부들이 파시즘에 완전히 경도되어 적극적으로 침략 전쟁,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참여하는 등 논란이 있다. 추축국 항목 참조.] 또한 몽강자치연합정부만주국과 같은 격으로 분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의 판도는 더 넓어야 한다. 만주는 1905년에 점령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관동군이 철도 수비대로서 주둔했고 다롄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만주는 여전히 러시아의 영역이었다.

탄생 직후부터 계산하면 일본 제국의 판도는 수십 년(79년)이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자신들이 침략하는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국가였다. 때문에 실제로 제국주의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던 강대국들에 비해 작은 규모[* 태평양전쟁 개전직전 미국과 일본제국의 국내총생산(GDP)차이가 10배에 달했다.]임에도 일본은 이러한 체급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고 이나마도 1895년 겨우 일개 중소 국가를 벗어나기 시작해 최대 패권을 갖추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아시아에서는 이미 그때 독보적 역량을 가진 국가였다. 최대 영토를 갖춘 것은 1942년 중엽 남방작전이 끝난 이후이다.

이후 일본 제국은 2차 대전의 결과 1945년 8월에 붕괴한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일본의 제국주의는 초기부터 상당히 삐걱거리고 있었다. 천년 단위로 고립주의를 천명해오며 섬에 틀어박혀 있던 일본이 열도 외부에서 식민 지배를 원활히 이뤄낼 리 만무하기도 하고 이를 원활히 지배할 국력도 일본에게는 부족했다. 일시적으로 동아시아의 절반을 집어삼킬 군사력은 있었지만 그것을 유지할 국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의 식민지나 점령지중 안정화 되었다고 할만한 국가는 패망 후에도 자기들은 언제 일본에 따라가느냐 묻던 대만 정도가 유일하다. 그런데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제국주의의 야욕에 병력을 분산해 몸집을 불리고 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일본 제국은 극심한 행정 혼란 가중, 자원 부족 등이 겹치는 총체적 난국을 겪는다.

국가와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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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욱일기가 공식 국기인 것으로 아는데, 그건 군기#s-2고 일본 제국의 공식 국기는 엄연히 일장기다. 다만 1999년 법으로 정한 지금의 일장기보다 붉은색 원의 크기가 좀 더 크다. 자세한 것은 일장기 문서를 참조. 국가는 비공식 국가로 기미가요. 자세한 것은 기미가요 문서를 참조.

역사

건국 이전

|| width=500 || || 1868년(게이오 4년) 왕정 복고의 대호령 || 도쿠가와 막부는 중국, 조선을 비롯하여 극소수의 국가를 빼면 통상 교역을 금지한 해금(海禁)정책을 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영향력 강화에 기여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서양 열강들(네덜란드,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지속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점차 해금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당시 일본 특유의 정치 체제인 幕藩体制[* 사실 정자로 쓰고 '幕藩體制(막번 체제)'라고 읽는 게 딱히 틀린 용법은 아니지만 현대 일본어에서는 한국어 맥락에서의 정자체(구자체) 體 대신 신자체 体를 쓴다. 과거에는 일본도 전자로 쓰긴 했다. 또한 체제의 이름 역시 고유 명사에 가까우므로, 신자체로 쓰고 '바쿠한 체제'라고 읽는 게 좀 더 정확하다.](막번 체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일본은 번(藩)이라는 지방의 자치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들을 막부에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볼모를 보내고 그친 게 아니라 번주가 에도에 주기적으로 와야 했다. 그 이동에는 당연히 막대한 비용과 엄청난 시간이 들었다.] 번들의 경쟁을 이끌어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중앙 집권적 효과를 노리는 정도에 그쳤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도쿠가와 막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반대로 지방 번들의 세력들이 커져갔다.[* 일본은 왕통의 교체는 없다시피 했지만, 도무지 중앙 집권이 되지를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이 강해진 번을 웅번이라고 하는데 이 웅번들 가운데서도 특히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4개 번이 그 기세가 가장 강대하였다. 이들은 서구 열강과의 밀무역으로 근대적인 무기들을 도입하였고, 재정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다시금 왕년의 전성기를 회복하고자 3대 개혁을 펴지만 모두 실패했다. 경제의 혼란, 무사(특히 하급 무사)의 잉여화,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따른 정치적 각성,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 등 여러 사건이 이어진 끝에 에도 막부는 그 정치력을 완전히 잃었다. 위에 말한 웅번들이 막부의 몰락에 한몫을 담당했다. 졸지에 사면초가 신세가 된 도쿠가와 막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정봉환을 단행하였으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급진파는 이후로 도쿠가와 막부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동시에 쿠데타를 일으켜 교토고쇼를 점거하여, 메이지 덴노에게 왕정 복고의 대호령을 선언하게 하면서 요시노부를 정치권에서 완전히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후 1868~1869년 사이에 벌어진 무진전쟁을 통해 구 막부 잔당들을 완전히 몰아내어, 새롭게 정치판의 강자로 떠오른 웅번들은 판적봉환[* 다이묘(번주)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천황에게 반환.]과 폐번치현[* 지방 통치를 담당하였던 번을 없애고 그 자리에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을 설치.]을 단행했다. 지방 영주가 스스로 중앙 귀족에 올랐다.

제국의 탄생

|| width=500 || ||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사절단 || 새로운 웅번들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려고 덴노를 이용했다. 이는 명분적으로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최고 권위자는 쇼군이라 일본어장군을 뜻하는데, 형식적이나마 쇼군덴노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일본을 다스릴 뿐이었고 일본의 진정한 통치자는 덴노였다. 그리고 700년 사이 7만 평 남짓한 땅을 받고 살아가던 덴노는[* 참고로 여의도가 무려 87만평이다...] 순식간에 일본 최고 정치 권력의 정점에 등극했다. 이 뒤에는 엄청난 정치 공작이 있었다. 철저한 중앙집권체제,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사상이 일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이들은 서구 열강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크게 느꼈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려 유럽으로 보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표는 2가지였다. 하나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다시 교섭하여 평등 조약으로 바꾸기, 다른 하나는 서구 열강들의 정치 체제를 공부하여 일본에 도입하기. 그러나 일본 자체의 정치 역량이 모자랐던 까닭에 1번째 임무는 실패한다. 대신 그들은 2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정치 핵심부의 해외 사절 경험은 일본 정치에 그대로 넘어왔다. 예컨데 이토 히로부미독일로 넘어가서 헌법을 공부하고 온 바 있다.

그래서 헌법은 프러시아 것을 채용하고, 민법은 프랑스인 보아 소나드를 법률 고문으로 초빙하여 프랑스 것을 채용하여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스페인의 시스템은 1인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고~~결국 그렇게 되지만~~, 영국은 국회에 주권을 너무 많이 넘겨주는 것으로 판단됐고, 미국은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프러시아 헌법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다만 서구 법률을 받아들이면서 시민의 권리나 권익에 관한 사항 중 일부는 지배 계층의 편의에 맞게 취사선택 및 변형 채택되었고[* 특히 농업의 소작 계약을 예로 들면 이렇다. 땅주인인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을 두는 형태가 소작이다. 프랑스 민법의 경우 땅을 빌린 소작인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소작권을 인정받아, 자기 땅이 아닐지라도 지주에 의해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함부로 처분될 수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가 프랑스 것을 본받아 일본민법을 재정할 때는 이 항목을 제거하고 지주의 처분권만 남겨두었다.] 천황의 권한을 확고히 하는등 온전한 민주주의적 헌법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선거권도 1889년 중의원 선거가 처음 치러졌을때부터 1920년대 본토에 살던 25세 이상 남성에게[* 여성 투표권은 1945년 종전 직후에 주어졌다.] 보통 선거권이 주어질때까지 소수의 상류층 내지 중산층이나 가졌던 것이고, 다수의 하층민들은 중의원 투표권을 가질수조차 없었다. 그러하니 식민지 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질 껀떡지도 없었던것이다. 다만 식민지인들도 일본 내지에 거류하게 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제 시대 당시 선거 포스터에 보면 한글이 같이 표기된 포스터들이 발견되는데 내지의 재일 조선인들의 투표 안내를 위한 것이다.[* 주간 동아 기사 http://weekly.donga.com/List/3/all/11/63344/1 여담으로 이 기사에서 언급된 마스조에 요이치 소장은 이후 도쿄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식민지 조선 출신의 국회 의원으로 친일파 박춘금이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비민주적인 정부다보니 그 과정에서 지역 중심 인사가 횡행하였고 부정부패가 심했다. 특히 이들이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서구 문물의 도입과 국민 의무 교육의 시행으로 정치 제도와 시민 문화를 바꾸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지역주의가 사라지고[* 보신전쟁서남전쟁으로 그 당시에 성행하던 지역주의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국가주의를 교육에 몰빵한것이다. 국가신토에서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 "일본 열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땅이다"라고 지랄을 해대니 얼마나 세뇌가 심했을지 알만하다.] 전 국민이 황국신민으로 일체화하면서 아래의 비판 능력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봉쇄했다. 또한 지극히 혼란한 상황인지라 상층부의 권력 다툼도 늘 일어났고, 금방 내각을 개편했다. 자국의 상황에 맞는 성찰 없이 외부로부터 그대로 이식한 서양식 정치가 보수적인 일본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제국헌법

|| width=600 || || 1889년(메이지 22년) 헌법 반포 약도 || || width=600 || || 천황 정전 헌법 발포식의 安達吟光그림 ||

대 일본 제국 헌법(大日本帝国憲法)은 1889년(메이지 22년) 2월 11일에 공포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11월 29일에 시행된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일본의 헌법이며, 공포 당시의 메이지 덴노의 이름을 따서 메이지 헌법(明治憲法)이라 부르거나 단순히 제국 헌법(帝国憲法)라고도 부른다. 현행 일본 헌법과 대비해서 구 헌법(旧憲法)이라고 부른다. 단기간 정지된 오스만 제국 헌법을 제외하면 아시아 최초의 근대 헌법이다.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시행까지 반세기 이상 동안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1947년(쇼와 22년) 5월2일까지 존속하고 제73조 헌법 개정 절차를 거쳐 이듬해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헌법 발포의 칙어에서 "불마(불멸)의 대전"(不磨ノ大典)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인지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된 일은 없었다. 또한 청나라흠정 헌법 대강에도 영향을 주었다. 상세 내용은 일본제국헌법에 기재

전성기

일본은 점차 제국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국가를 개혁하고 군사력을 완전히 서구식으로 개편하여 증강하였다. 류큐왕국을 강제 병합시킨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만을 병합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에 타격을 주면서 대한제국을 침탈하는 모습이 그려진 정치풍자 그림엽서||

또한 만주와 내몽골, 중국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여 만주국, 몽강자치연합정부 등의 꼭두각시 국가들을 만들었다. 일본의 식민지 대상이었던 국가들은 당시 일본군에 비해 한 주먹거리도 아닐 만큼 군사력이 빈약했기에, 점령하는 데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근대화에 실패한 개화파 등이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짧은 전간기 사이, 유럽에 전쟁 물자를 수출하던 일본은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은 이로써 러일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했고, 그동안 외국에 진 모든 채무를 갚은 것과 동시에 수십억 엔의 순채권국이 되어 장차 긴 전쟁을 치를만한 국력도 조금 쌓았다. 이후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호황의 부가 효과로 서민 경제도 어느 정도 나아지는 효과를 얻었는데, 현대 일본의 노인들이[* 현재는 90~100세 초중반이다.] "그래도 그 때는 전쟁만 아니었다면 좋은 시절이었지..."라고 회상한다면 십중팔구는 이 때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이 다이쇼 시대는 서브컬쳐 등에서도 꽤나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 나오는 제국시대 일본의 풍경화나 그림들도 대부분 이 때를 묘사했다. 서브컬쳐 등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다이쇼 로망이라고도 한다.

폭주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시였다. 점차적으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높아져갔고, 상황이 다급해진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한다. 당시 관동 대지진 때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거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 일명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이 둘은 다른 사건이지만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기사]를 참고하고 후자는 금해금 문서 참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이 두가지가 [[1]] [[2]] 나와 있으니 참고.~~]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을 이룬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아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면서 마침내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공공 건설을 늘리는 뉴딜 정책, 유럽은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만한 나라가 주변에 별로 없었을 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미약했다.[* 일본이 보유한 식민지들은 여타 유럽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과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유럽지역의 식민지들은 공업 개발이 미약했던 반면 풍부한 원자재 공급처였기 때문에 원자재를 가져와 본국에서 제품을 생산한 뒤에 다시 되파는 돌려막기로 어느정도 근근히 버텨나갈 수 있었지만 일본의 주요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은 정치/군사적 목적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돌려막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본국의 재정을 빨아먹어 손해만 내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선을 병합한 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 그해 1년 예산의 90% 이상이 경성(한양)의 상/하수도 기반시설 설치에 소요될 정도였다. 참고로 이 당시 경성(한양)의 상/하수도의 열악함과 불결한 위생상태는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을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 분노하기 시작한 군부 내 급진층은 조금이라도 온건적 혹은 중도적으로 판단되는 총리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기 시작, 일본 육군일본 해군이 엮여 두번에 걸친 쿠데타를 시도하게 된다. 1932년에 거국내각이 조직되면서 일본을 움직일 통합된 통치구조가 형성되었고 두 차례의 쿠데타 미수로 일본의 밑으로터의 파시즘은 분쇄되고 기타 잇키 등이 처형되었으나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집권하여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대에 굴복하게 된 일본 제국 정계는 결국 중일전쟁으로 폭주, 일본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도 없는 총력전을 선택하게 된다. 관련해서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조.

1931년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멋대로 일으킨 만주사변을 막지 않은 일본 제국은 고작 연대장에 불과한 무타구치 렌야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 것도 처벌하기는 커녕 기회로 여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꼴도 묵인했고 결국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해 나라가 군부에 먹히고 말았다. 이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은 일본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내 모든 곳에서 철수할 것을 통보했고 이를 어길 시 석유 등 주요 자원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 일본은 석유 수출의 90% 이상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그러자 일본은 선전포고도 제대로 안 하고[* 사실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 전 선전포고 공문을 보냈으나 주미일본대사관이 암호화 된 공문을 해독하여 문서화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고, 미국 정부에 전달했을 때는 이미 미국 전역에 일본의 공습이 보도된 이후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에 진주만 공습을 벌여 미국에게 대책도 없이 전면 도전하는 자살 행위를 한다.~~그리고 동맹 맺은 유럽의 동맹국독소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에 쳐들어갔다가 동장군과 진흙탕에...~~

유럽과 아프리카의 싸움으로도 정신이 없던, 심지어 본국이 무너지기까지 한 유럽 국가들은 서태평양 지역에 소홀하게 대처했고, 기세를 탄 일본은 중국의 절반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까지 휩쓸며 내친 김에 인도와 남태평양까지 진출했다. 1942년, 일본 제국은 동북아에서 동남아, 남태평양까지 이르는 최대판도를 형성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시 뒤 귀축영미라는 단어가 유행했는데, 귀신짐승같은 영국미국이라는 뜻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짐승같은 물량과 힘, 귀신같은 기술력과 기동력.--

멸망

(태평양 전쟁 문서 참조)

사실 일본 제국은 이미 자국의 군사력이 미국의 군사력에 뒤쳐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상 차이가 있더라도 주요 전력에 선제 공격을 취하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 계산하였다. 문제는 일본 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도 미국 태평양의 해군력은 일본 제국 해군력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며(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 당시에는 일본제국 해군력이 미 해군력을 상회했다.) 미국은 압도적인 공업기반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열세를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제국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대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양 국가를 없애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실행시켰다. 즉, 이 당시 이미 미국의 국가기반은 유럽을 상회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물론 전력 열세에 선제공격을 한 상태였으며 전쟁 초기에는 일본 제국군이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갈수록 세를 불려가는 미군에 의해 수세에 몰린 일본 제국은 내지의 일부인 오키나와를 뺏기고 전 국토가 미공군의 공습으로 불바다가 되는 등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럼에도 항복을 거부하던 일본 제국은 미국의 원자폭탄2번이나 맞고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가하자 마침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전쟁은 종전되었다.

패망 뒤에도 헌법 개정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아 헌법상 국호는 계속 '일본 제국'이었으며,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1947년 5월 3일일본국 헌법이 발효되며 정식 국명을 일본국(日本國, Japan)으로 고쳤다. "일본국" 이름 자체를 영어로 직역하면 "State of Japan"이지만 실제로 이런 이름으로는 매우 드물게 쓴다. 한편 이스라엘은 정식국명이 일본과 똑같이 "이스라엘국"이고 영어로 "State of Israel"라 번역하는데 일본과는 다르게 정식 영어 국명으로 쓴다.

일본 공화국이 아닌 일본국인 이유는 기존의 덴노제 자체를 긍정해서이다. 하지만 미군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덴노의 권한을 사실상 없애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고, 때문에 현대의 일본에서 덴노는 그저 국가의 상징일 뿐 아무런 권력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가 되었다. 심지어 덴노를 정치적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암살 위협을 받을 정도이며 때문에 덴노 본인도 행동 하나하나를 궁내청이 제한하는 수준이다.

군사

[include(틀:일본군)]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 항목 참조.)

일본 제국이 점령한 영토

||<tablealign=center>width=100% || || 1942년 일본 제국 최대 영토 지도[* 1944년 대륙타통작전으로 화중, 화남의 영토가 중국 전선에서 최종적으로 추가되었으나 그땐 버마와 필리핀에서 밀리고 있어서 최대 영토는 아니다.] [* 참고로 태국은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긴 했지만 명목상으로 주권국이었으며 일본 제국의 점령지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사실상 추축국에게 대항했다면 바로 점령 당했을 것이다.] || [include(틀:일본 제국의 외지)] [include(틀:일본 제국의 괴뢰국)]

* 자세한 건 일제강점기(동음이의어) 참조.

평가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나, 현대 사회로의 근본적인 사회구조 개혁에 실패한 채 폭주한 채 멸망한 국가로 평가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독일을 롤 모델로 삼고 서구화, 현대화를 추구하였으나 정작 현대 사회의 마인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시스템은 현대, 가치관은 근현대, 마인드는 근대라는 괴상한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나마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던 문민통치 시기에는 이게 먹혔으나 1930년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국수주의가 일상화되면서 더욱 악회됐다. 동도서기나 중체서용 같은 운동의 문제점이 그대로 확대된 셈.] 비록 관료제 아래에서 치밀하고 조직적인 악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과 비교해해 일제의 만행은 전근대적 국가의 미성숙함에서 온 바가 컸으나 그렇다고 일제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범죄와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일제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그 규모가 나치에 미치지 못할 뿐 잔혹성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평가된다. 731 부대에서 진행된 비인도적 인체실험 또한 아우슈비츠의 마경에 뒤지지 않는다 평가된다.난징대학살, 그리고 이를 위시한 전대미문의 학살 명령인 신멸작전 등의 전쟁범죄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일본과의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다. 물론 대만은 당시 일본이 자국의 선진성을 홍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식민지배 정책을 펼쳤으며, 타이완 성 이외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려 강도높은 친미 및 친일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더불어 비교적 빠르게 감정이 회복된 편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 말할 필요도 없다. 한일관계 항목 참조. 전쟁 피해국인 중국 본토, 동남아시아 전역의 국가들 및 인도는 이 당시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어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으며 이를 회복하기까지 일본의 수많은 원조에도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다. 다만 이들 국가도 21세기 중국이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에 강도높은 무력행사를 동원하면서 대미 외교창구로서 일본을 의지하였고 최근에는 남중국해에 자위대 군함이 들어갈 정도로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지구 반대편이라 그런지 대부분 이런 일본의 제국주의에 무지하고, 이 때문에 일부 일빠가 일제에 대해 무지한 소리를 하여 논란을 빚기도 한다. 다만 일본은 미국 등과 같이 승전국의 지위에 있는 국가들에 대해서만 상당히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대만과 동남아 국가들이 장기적으로 중국 견제를 위해 친일 기조로 돌아서면서 현재까지 한국처럼 일본을 증오하는 나라는 중국밖에 남지 않았다. 해당 항목 참조. 하지만 현 시점에서의 국가간 관계는 둘째치더라도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부정하는 국가는 없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일본의 과거사까지 정당화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UN 헌장의 적국조항

유엔헌장의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대상이 되는 국가'와 관련해 일제가 아닌 현대 일본에 대해서까지 전범 국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전범 국가는 '과거에 전쟁을 범한 국가'라는 의미다. 다만 2차대전의 승전국에게 적대한 국가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clauses, 敵國條項)]은 있다.

또한, 이러한 조항은 전후 일본이 사죄 차원에서 국제 사회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행했고 UN에 가입하여 막대한 분담금을 내는 현재에도 건재하다. 비록 일본이 UN의 적국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나, 헌장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상임이사국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며 이들은 적국조항의 필요성과 별개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상징으로 해당 조항을 남겨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2010년대까지 일본을 과거사로 압박하는 중국이 동의할 가능성이 0%이다. 때문에 일본 내 극우파들이 해당 용어의 사용에 불만을 가진다 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이므로 사용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보아야 한다.

일본의 재무장 이후 적국조항이 군대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우려하는 일본 내 의견이 있다.

전후 일본의 관점

아직도 일제의 망령은 현재의 일본 사회에 짙게 깔려 있다. 한때 일본 제국 시절의 부정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교육을 폈던 시절도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기부터 점차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들어와서 모리 요시로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하여 이런 교육을 도게자 교육 또는 암흑사관 등으로 부르며 "역사는 한쪽 측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가, "국민의 반 애국심을 키우는 자학사관이다!"라는 어이없는 까닭을 내세운 탓에 현재는 교육 일선에서 이런 내용을 배제하는 출판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른바 극우 교과서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이 경계해야 할 부분. 게다가 아베 정권의 집권기는 2017년에도 아직 지속되고 있다.

일본의 극우 세력

군국주의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 극우 세력이 문제시된다. 니시베 스스무([ruby(西部邁, ruby=にしべ すすむ)])는 이것을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観)에 빗대어 자위(딸딸이)사관이라고 비판했다. 대동아 전쟁 긍정론의 일본 우익(세뇌된 넷우익 포함)들에게는 일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본 제국은 올바른 국가였고, "백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노예식민지 지배 상태이던 아시아 나라들의 해방을 위해 싸운 정의롭고 위대한 일본!"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으로 소수의 귀족, 소수의 재벌,소수의 군권력자 등을 제외하면 일본 본토 국민들에게도 상당히 괴로운 시기로 소수의 제국주의자 사치와 허영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전쟁과 재벌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간 시기다.[* 심지어 종전 후에도 재벌들은 주요 기술을 승전국에 제공하고, 고위 관료, 장군들 역시 731부대의 실험 자료와 다른 자료들을 비밀리에 전부 넘긴 뒤에 살아남았다. 기존의 재벌그룹은 해체됐지만 전후 다시 만든 재벌들에게 적용되는 조항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그럴듯한 그룹을 새로 만들어 회장 노릇을 계속 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분이 줄창한 일본 쑥밭론(...)에 의해 죽어나간 일본 국민들을 생각하면 천인공노할 노릇.]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그의 만화(<전쟁론>, <대동아론>)와 인터뷰 등을 거쳐,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악',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선'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너희들 자식이 싸움 잘하는 골목 대장한테 두들겨 맞고 집에 왔는데 너는 싸움에서 졌으니까 '악한' 놈이라고 자식한테 말할 수 있느냐!"나 "이제까지의 역사관은 이긴 놈들의 논리가 넣어 세뇌한 '자학사관'이다. 일본의 대동아 전쟁은 자랑스럽고 정의로운 전쟁이였다!"라 주장한다. 자기들 자식이 싸움 못하는 동네 애들을 꼬붕으로 부리고 때리고 금품 갈취를 하면서 괴롭히는 걸 골목 대장이 말리니까, 그 뒤통수를 돌로 내리쳤다가 붙잡혀서 얻어터진 사실은 언급도 안 한다. 자기 자식이 골목대장에게 얻어터진 것이 아니라 골목대장인 자기 자식이 금품갈취, 상납, 학대 등을 일삼다가 경찰아저씨한테 걸려 된통 얻어터진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더 가관인 건 일본 제국 시기를 일본의 최전성기로 생각하는 정신 나간 작자들도 있는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비록 일본 제국이 당시 열강의 반열에 들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근대화 수준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미국 같은 당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에 비해 부족한 면도 많았고 국력 면에서도 제국주의 열강 중에서는 하위권에 속했다. 당장 2차대전 시기 추축국들의 경제 규모 서열을 봐도 독일, 일본, 이탈리아 순인데 독일은 소련과 동급이고 이탈리아와 일본이 비슷비슷하다. 즉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는 2류 정도였다는 뜻. 도리어 그 기형적인 규모를 유지하느라 미국에 선전포고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일본의 진짜 최전성기, 즉 황금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4 도쿄 올림픽1970 오사카 엑스포,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등을 개최하면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자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1970~80년대 거품경제 시기다. 물론 일본 제국 시기에 쌓아놓은 유무형의 자산이 어느 정도 이 때의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이 시기를 전성기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최전성기를 여는 데 영향을 미친 것과 최전성기 그 자체인 건 엄연히 다르다~~

심지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일본 제국이 신화상의 일본 건국일인 기원전 660년(...)부터 지금까지(~ 표시로) 있는 것마냥 적어놨다. [[3]]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란 말을 쓴 진시황보다 몇백년이나 먼저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코미디 같다고 느꼈는지 몇 번 중립적인 서술도 했으나, 광란에 휩싸인 어린 넷 우익이 지속적으로 공작했다. 그 뒤에는 각주로 그 경위를 살짝 따로 적는 유치한 짓거리를 해놨지만, 이는 명백히 틀린 주장이다.

덴노가 아무리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왕위를 계승했다지만, 일단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의 실체부터 불명이다. 결정적으로 덴노가 일본을 스스로 통치한 기간은 일본사를 통틀어 보면 정말 얼마 안 된다. 즉 일본에서 덴노의 의미는 일본 열도의 국가 원수/통치자라기보다 정신적 지주에 가깝다. 일본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기간 사이 막부가 일본을 통치했으니, 막부를 일본 정부로 보고 막부의 쇼군을 일본의 국가원수로 봐야 맞을 것이다. 애당초 서양인과 와패니즈도 1800년대 이전의 일본 국가체제를 'Shogunate(막부)'로 부르지 'Empire(제국)'으로 부르지 않는데, 이런 마당에 그런 공작은 웃음거리일 뿐이다. 더군다나 국가의 존속 기간을 따지는 필수 요소인 정식 국명으로 따져봐도 일본국은 일본 제국과 엄연히 다른 나라다. 게다가 일본 헌법의 변화로 일본 스스로 덴노를 국체로 규정하지 않는 마당에 이러한 주장은 일본 헌법을 부정하는 코미디다.

결론적으로 일본 제국의 존속 기간은 에도 막부의 멸망(1868) 뒤부터 연합군 통치 시대 전(1947)까지의 79년간으로 봐야 옳다. 제아무리 일본 우익들이 천년 제국을 꿈꿔본다 한들, 객관적으로 보면 백 년도 못 간 제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쟁 피해자들의 관점

핵심을 요약하자면 거의 모든 피지배국의 원수이고, 나치 독일에 버금가는 광기 어린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종종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것 뿐이라며 논점을 흐리는 이들이 보이는데[* 재미있게도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그렇다면 보불전쟁프랑스백년전쟁영국도 악당으로 남았을 것이다. 당장 이탈리아는 똑같이 추축국이었으며 파시즘 독재국가로 기억하고 반면교사인 점은 비슷하나, 최소한 일제나치 독일만큼 인간말종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전쟁 중에 실책만 가득 저지르고 그다지 한 일도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이탈리아군도 마냥 깨끗한 것만은 아니지만 최소한 국가나 군대가 주도해서 대량학살극을 저지른 나치 독일이나 일제에 비하면 훨씬 양호하다. 워낙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악행이나 전쟁범죄도 연합군의 전쟁범죄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수준이다.]~~사실상 연합국의 다크나이트~~ ~~추축국 중에 스파이가 있는 거 같아~~ 결정적으로 전쟁에서 져서 악의 축으로 낙인찍혔다는 말이 모순인 게 일본은 가장 빠르게 서구화를 했고 약육강식을 기본으로 한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확장에 가담한 아시아 국가였다. 더군다나 이러한 제국주의 열광이 본격적으로 식어버린 2차 세계대전의 양대 산맥중 하나였던 태평양 전쟁의 시작역시 일본이 시작했다가 패망해 버린것이다. 일본 제국이 패하기 전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르면 일본 제국은 할 말이 없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일제나치 독일은 단지 전쟁에서 져서가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전쟁 범죄들 때문에 비난받는다. 나치 독일유대인학살했고 집시를 거의 절멸시켰으며, 우생학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독소전 당시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이 천만단위다.] 한편 일본 제국은 의학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악마같은 생체 실험을 저지르며 군인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것을 만들어 동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을 잡아갔고, 점령지의 네덜란드 여성들도 잡아가 성노예로 썼다.[* 다만 네덜란드 또한 해당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려 진출했던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피해자였던 한국, 중국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과는 다소 논점이 다르다.] 일본 제국이 점령지의 서구권 여성들까지 잡아다 위안부로 썼다는 사실은 명백히 기록으로 남았고, 이는 현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서 서구 국가들에게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의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은 동양인 위안부에는 그런 것 없었다느니 사실은 매춘부였다느니 당사국 간의 문제라느니 온갖 개드립과 회피술로 일관하는 반면, 네덜란드 등 서양인 위안부에는 저자세로 굽실굽실거리는 이중적인 모습이라서 비난을 받는다. 물론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고 있기에 네덜란드는 이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심지어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처럼 미군 포로를 술안주로 잡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어느 호주 노인 여성이 자신 또한 위안부로 잡혀갔었다며, 서구 여성이 네덜란드인만 잡혀간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식민지배 사과 및 보상 문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총리들의 담화를 통한 몇 번의 공식적인 사죄가 있었으며 이것이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베 2차 내각에서 터져나오는 온갖 과거사 관련 망언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 공식 입장은 개인으로서의 의견일 뿐이며 일본은 공식적으로 각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우경화 발언을 막지 못하면 담화를 계승한다 할 수 없다는 중국 및 한국의 반발이 크다. 한편으로, 일본은 연합국의 주체가 되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및 서방 국가와 한국에 대해서는 전후보상을 했으며[* 한일기본조약은 배상금의 분배 과정에 매우 큰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배상 자체는 일본이 미국에게 등을 떠밀려 하긴 했다. 즉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한 배상이 완벽하지 않았다면 이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문제다.] 중국과 중화민국에 대해서도 각국이 스스로 국가 차원의 청구권을 포기하였으나 국민들에게는 배상 및 무상원조를 진행중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태도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군은 당시 일본군의 활동영역이었던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사할린 등지에 쳐들어가 약 64만명 정도의 일본군(일부 '민간인'포함)을 포로로 생포했다. 국제조약상으로 보자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어야 하나, 대부분 돌려보내지 않고 시베리아 등지의 수용소로 보내어 그곳에서 2~4년간, 아주 재수없는 경우는 11년까지 노역을 시켰으며 그 결과 최소 6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소련에 끌려갔던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닌) 일본인 생존자들은 나중에서야 강제노동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정부에선 공식적으로 이를 요청할 수 없었다. 이미 1956년 일소 공동성명을 통해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배상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 정부는 어물쩡 시간을 넘기다가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된 뒤 "1956년에 포기했던 건 국가간의 배상청구권이었지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저기서 말한 청구권이란 말 그대로 배상 관련해서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지 배상을 받을 권리는 아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다.

또한 한국은 전후 청산에서 승전국이 아니라 추축 부역국이었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하며 자세한 경위는 해당 항목을 참조. 냉전 구도에서 공산진영을 포위할 동아시아 경제 블록을 구축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으나 이마저도 각국 정부의 입장 차이로 사실상 수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1953년 3차 회담에선 일본 대표인 구보타는 "일본 측도 (한국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 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든가, 철도를 건설한 것, 수전(水田)이 상당히 늘어난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 발언하거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당해 더 비참했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한국을 자극하였다. 다만 실제로 일본이 주장한 역청구권은 일본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제3자인 GHQ도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는 등 그 실체가 없다고는 볼 수 없었으며, 일본의 국가재산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사유재산까지 한국에 불하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군은 적지의 사유재산에 손을 댈 수 없다는 헤이그육전규칙 제 46조를 위반하였다는 일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합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이후 답보 상태를 거듭하던 배상 문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한일관계 항목 참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배상 책임이 청산된 뒤에도 수많은 공적원조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비단 한국에만 제공되지는 않았다. 일본의 원조 중 규모가 큰 몇가지를 특기하자면 공적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와 아시아 여성기금(Asian Women's Fund) 등이 있는데, 이러한 원조를 받은 동남아권의 전쟁 피해국들은 반일 감정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또한 이들 국가는 일본 정부의 노력과 별개로 중국의 팽창 때문에라도 친일 기조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에서 무력시위를 동원하며 갈등을 노골화하자 배트남이나 인도네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을 통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런 국가들을 대상으로 대미 외교창구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동중국해 영해분쟁에 미국이 개입한 배경에도 일본의 중재가 컸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후에는 심지어 자위대 군함이 직접 남중국해에 행차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미국(+일본)이 있어야 중국을 막는다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동남아 국가들은 일본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애시당초 동남아 일제 전쟁피해국들의 GDP를 긁어모아도 일본의 GDP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인식은 냉정한 현실인식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문서의 내용은 일종의 요약본이며 법리적 배상은 한일기본조약 항목에, 이후 한일관계의 흐름은 시계열 순으로 한일관계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전범기업의 스탠스에 대해서는 미쓰비시그룹 항목 참조. 하시마 섬 강제노역의 수혜자이므로 사실상 전범기업의 대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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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매체에서의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 함께 2차 대전 배경 작품의 단골 악역으로 등장한다. 일본 제국이 컨트롤 가능 세력으로 나오기는 한다. 일단 선의 세력으로 나오는 것들은 거의다 일본산이고 서양 쪽에도 일제,혹은 일본 비슷한 것의 처지에서 진행할 수 있는 게임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물론 일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일본제국 자체가 선의 세력으로 나오는 경우는 절대 없다. 라이징 스톰,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이쪽은 욱일 제국으로 패러디됐으며, 처음 공개 때는 일제 미화 논란이 있었으나 점점 자료가 나오면서 노골적인 병맛 넘치는 개그 캐릭터 진영으로 희화됐음이 밝혀져서 논란이 가라앉았다.], Hearts of Iron 시리즈 등이 그 예. 종종 선역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런 매체는 당연하게도 대제국, 감벽의 함대 등의 일본산 극우 미디어물, 가공전기같은 국뽕물이 대부분이며, 적이 외계인, 좀비라도 되지 않거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말하는 작품이 아닌 이상[* 이런 작품에는 간간히 일본군과 군인 개인이 선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평범한 일본군 말고 일본 제국 수뇌부라면 100% 악역이지만.~~] 이상 상식적인 감성으로라도 선역 배정은 불가능하다. ~~그냥 좀비들이 적이어도 아군은 안되고 흑막 수준으로 나올 듯~~

2010년대 들어서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웹소설 등 비교적 서구권 국가의 눈에 띄기 어려운 매체를 중심으로 은근히 일본제국 미화가 진행되고 있다. 역사 속 일본제국 그 자체를 대놓고 정의의 사도로 묘사하는 작품은 아직 드문 편이지만 통치체제나 구성, 성립배경 등이 (극우들이 주장하는) 일본제국과 거의 똑같은 것이 문제. 

워해머 40000의 인류제국의 경우 작 중 행적과 황제에 대한 숭배가 일본 제국과 흡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숭배는 개인에 대한 광신으로서 역사상에서 모티브가 될만한 것을 찾자면 얼마든지 많이 있다. 당장에 아돌프 히틀러만 봐도 그러할 것이다. 인류의 순수성에 집착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딱히 일본제국만 비슷하다고 할 수 없는 세력이다.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은 인류제국처럼 압도적으로 강하지도, 간지가 나지도 않았다. 일본군의 안습전설은 이미 유명해질대로 유명해진지 오래다.

관련 문서

일본의 동맹국들

* 나치 독일
* 이탈리아 왕국
* 헝가리 왕국
* 태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들도 동맹국 취급이 가능하나 이들은 아래에서 서술함.

일본의 괴뢰국들

[include(틀:일본 제국의 괴뢰국)]

* 만주국
* 몽강연합자치정부
* 찰동특별자치구
* 진북자치정부
* 찰남자치정부
* 상하이 시 다다오 정부
* 지둥방공자치정부
* 중화민국 임시정부
* 중화민국 유신정부
* 왕징웨이 정권
* 캄보디아 왕국
* 버마국
* 필리핀 제2공화국
* 자유 인도 임시정부
* 베트남 제국
* 라오스 왕국

일본의 전쟁범죄

* 일본의 전쟁범죄 문서 참조.

기타

* 야스쿠니 신사
* 히키아게샤 - 1868년 메이지 유신 뒤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까지 해외에 살다가 귀국한 일본인들.
* 대동아 공영권
*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
* 구 일본군 헌병대
* 교육칙어
* 일본군- 일본 제국의 군대.
* 대일본제국헌법
* 팔굉일우
* --치하탄 학원[* 항상 하는 작전이 돌격뿐이니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관련 사건

* 강화도 조약(1876)
* 류큐 왕국 합병(1879)
* 갑신정변(1884)
* 동학 농민 운동 개입(1894)
* 청일전쟁(1894~1895)
* 의화단 운동 파병(1900)
* 러일전쟁(1904~1905)
* 을사조약(1905)
* 한일합방조약(1910)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21개조 요구(1915)
* 간도 참변(1920~1921)
* 제남 사건(1928)
* 나카무라 사건(1931)
* 만보산 사건(1931)
* 만주사변(19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만주국 수립(1932)
* 열하사변(1932~1933)
* 하매 협정(1935)
* 진토 협정(1935)
* 기동사변(1935)
* 수동사변(1936)
* 중일전쟁(1937~1945)
 *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상하이 사변
 * 트라우트만 공작
 * 난징 전투
  * 파나이 호 사건
  * 난징 대학살 사건
 * 왕징웨이 공작
* 할힌골 전투
* 태평양 전쟁(1941~1945)
 * 진주만 공습
 * 미드웨이 해전
 * 과달카날 전투
 * 이오지마 전투
 * 펠렐리우 전투
 *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 옥음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