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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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관련 문서4, top1=지진, top2=대지진, top3=일본 대지진, top4=수도직하지진)] [include(틀:사건사고)] [* 일본 격심재해법이 제정되기 전에 일어난 지진이기 때문에 이 틀을 사용한다.] ||||||<tablealign=right><:><bgcolor=#000000>{{{#ffffff {{{+1 관동 대지진(関東大震災)}}}}}}|| ||<bgcolor=#BC002D><:>{{{#ffffff 발생일시[br]^^(UTC+9)^^}}}||||<(>1923년 9월 1일|| ||<bgcolor=#BC002D><:>{{{#ffffff 진앙}}}||||<(>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시[* 혹은 아시가라카미 군 가이세이 정 요시다지마, 사가미 만 등.][* 여진은 사가미 만, 치바현 보소반도, 야마나시 현, 이바라키 현, 시즈오카 현, 가나가와 현 등.]|| ||<bgcolor=#BC002D><:>{{{#ffffff 진원의 깊이}}}||||<(> 23km|| ||<bgcolor=#BC002D><:>{{{#ffffff 규모}}}||||<(>M 7.9 || ||<bgcolor=#BC002D><:>{{{#ffffff 쓰나미}}}||||<(>최고 10m[* 사가미 만에서 일어난 지진 기준]|| ||<bgcolor=#BC002D><:>{{{#ffffff 지진 지속 시간}}}||||<(> 약 10분 || ||<bgcolor=#BC002D><:>{{{#ffffff 최대진도}}}||||<(> JMA 기준 진도 7 (가나가와 현, 지바 현, 시즈오카 현, 야마나시 현) || ||<bgcolor=#BC002D><:><|4>{{{#ffffff 피해}}}||<:> 사망자 및 행방불명 ||<(> 약 140,000명 이상 || ||<:>이재민||<(> 수십만 이상 || ||<:>재산피해||<(> 가옥 110,000여 채 완파, 100,000여 채 반파, 일부 군함 파손 ||


개요

간토대지진(일본어: 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 또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사가미 트로프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안세이 도카이 지진)이 있었고 그 이전에도 간토 남부 지방(미나미칸토)를 진앙으로 하는 지진은 여러번 있었지만 보통 간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

[YouTube(0LccGS5F3FE)] 지진 당시를 긴급지진속보로 시뮬레이션 해본 영상.

[YouTube(5WNqwK0osYU)] 마찬가지로 NHK긴급지진속보로 재현한 영상이다.

경과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난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9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동안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2의 첫 번째 여진이 도쿄만에서 12시 1분에 일어나고, 2번째 M 7.3의 여진이 야마나시 현에서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그 이후에도 12시 7분 이즈반도 근해에서 규모 6.0, 11분 규모 5.6, 17분 규모 6.4, 13시 20분 규모 6.2의 여진이 일어났다. 사가미 만에서도 12시 23분과 40분에 규모 6.5의 여진이 두 차례 일어났으며 12시 48분에는 야마나시 현에서 규모 6.8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3시 31분, 14시 22분, 16시 38분 시즈오카 현에서는 각각 규모 6.1, 6.6, 6.6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5시 19분 이바라키 현에서는 규모 6.3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7시에는 가나가와 현에서 규모 4.3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심지어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진 다음날에도 강력한 여진은 계속되었다. 3시 4분 야마나시 현에서는 규모 불명, 진도 5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4시 13분에는 후지 5호 근방에서 규모 4.6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1시 46분에는 치바현 남동부에서 무려 규모 7.3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18시 27분에는 같은곳에서 규모 6.9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22시 9분에는 시즈오카 현 이즈 반도 부근에서 규모 6.5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이틀만에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간토지방에서만 무려 15번[* 여진의 총 횟수는 수천번 이상]이나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 심지어 규모 7이상도 3번 일어났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칸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인 오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이다]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 ~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치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했다. 이로 인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는 동일본 대지진6배, 고베 대지진16배이다. 피해액은 지진발생 전년도 국민총생산액의 1/3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코스카 등 관동지역에 있던 군항에 있던 일부함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던 아마기가 대파[* 아마기 항목의 경항모가 아니라 아마기급 순양전함 1번함으로 동급 중 유명한 함은 항공모함 아카기이다.][* 이 때문에 폐기가 예정되어 있던 카가와 항공모함이 될 예정이던 아마기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미카사가 부두에 부딪혀 침수되는가 하면, 도쿄의 빽빽히 밀집된 목조 건물 구조로 인해 화재선풍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화재가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러한 화재로 인해서 지진 이틀후 도쿄의 기온은 무려 46도까지 올랐다. 또한 도쿄 혼조 육군 피복창 광장에선 수많은 인파가 피난갔는데, 그새 스미다강에서 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난보따리에 불이 붙어 4만 명이 타 죽었다.

복구

지진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컸던 이유는 내각의 상황이 좋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당시 총리였던 가토 도모사부로가 지진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암이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 그 과정에서 우치다 고사이 외상이 총리직을 대리로 맡았다. 당시 군축에 성공하면서 차관만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초를 닦을 정도로 원활하게 운영이 가능했던 내각의 수장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라 더더욱 안습. 지진 직후 참모본부에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의 천도가 검토되었다. 그러나 지진 발생 11일 후 발령된 조서에 따라 도쿄를 계속 수도로 삼기로 결정되자 천도설은 흐지부지되었고,[* 용인시 천도설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1980년대 한국이 원 출처로 제대로 된 원 증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는 사실상 비실증의 주장이다. 실제로 철도교통을 중시하는 일본의 특성상 간선철도의 경유지도 아닐 뿐더러 제대로 된 철도도 없었던 용인에 천도를 추진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무엇보다 너무 좁다. 경성이면 몰라도-- ] 이후 복구 과정에서 현대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더욱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고 만다. ~~안습~~

일본 최초의 아파트[* 이 당시 일본에서는 규모와 상관없이 공동주택 전반을 아파트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대규모, 고층아파트만 따로 '맨션'이라 부르게 된 건 2차대전 후 고도성장 시대에 들어서다.]가 세워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24년 5월 내무성의 지시로 '도준카이'(同潤会)란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의 주도로 1933년까지 도쿄와 요코하마 곳곳에 이재민들을 위한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몇몇 아파트들은 2000년대 초까지 남아있던 사례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게 오모테산도에 있는 '아오야마 아파트'였다. 2003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란 상가건물로 재건축되었으나 딱 한 동이 그대로 보존되어 카페건물로 쓰이고 있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인들이 자국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히 숙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경제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말년의 공황 분위기가 미증유의 국난으로 촉발된 게 정확하지만. 사실 고메이, 메이지 시절에도 지진은 있어왔지만 1923년의 지진은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도쿄에서 큰 규모의 여진과 화재로 인한 건물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본래 히로히토 황태자는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의 참상을 본 그는 결혼식을 미루었다. 히로히토 황태자의 약혼녀 구니노미야 나가코 태자비는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지었으며, 사다코 황후도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펼쳤다.

관동 대지진 학살

[include(틀:일본의 전쟁범죄)]

개요

[include(틀:관련 문서2, top1=민족주의 테러, top2=증오범죄)] 관동대학살(関東大虐殺) 또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으로도 불린다. 관동 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부터 약 3~4주에 걸쳐서, 일본 칸토(관동) 지역의 카나가와 현, 도쿄 부[* 현재의 도쿄 도.], 사이타마 현, 치바 현, 이바라키 현, 군마 현, 도치기 현, 나가노 현의 민간ㆍ 소속 일본인들이 조선인중국인에 대한 인종 제노사이드[* 이 과정에서 같은 일본인(당시로서 일본 내지인)도 상해 또는 살해당했다.]를 가한 사건이다.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무고인이 일본 정부치안 당국의 묵인, 방조[* 일본 내무성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일선 경찰에 '조선인에 의한 흉악범죄와 폭동을 경계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상태로, 조선인들이 계엄의 대상이 된 셈이다.]와 재해 현장의 무법적 상황 속에서 살해당했다.

상세 진행상황

>오래된 일도 아닌데 >깡그리 잊어버린 >일이 있다. >먼곳의 일도 아닌데 >아득히 제쳐 놓은 >일이 있다. >남의 일도 아닌데 >누구도 생각않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런 일은 >새록새록 숨어서 숨을 쉬는 법이다. >때만되면 억세게 튕겨져나와 >만갈래 비사를 외치게 한다. >의리가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가 나빠서 까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없는 걸로 >해두었던 것은 아니다. >새록 새록 그것은 우리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까먹고 싶어도 >아예 없었던 걸로 해두고 싶어도 >그것은 이제 너무도 억세어서 >고스란히 잠재울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 유일의 희곡『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3-4페이지의 코러스 중 발췌 (작가 김의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매일신보_조선인_폭동설.jpg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은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도쿄 일원 간토 지방은 지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러운 형편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리자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았다.

심지어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 '조선인들이 일본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 유언비어라고 하기에도 급이 너무 떨어지는 허황된 낭설까지 나돌았다. 한술 더떠 '조선인들 모두가 일본 열도를 영차영차 밀어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말도 안 되는 만평이나 프로파간다 그림까지 나왔다. --조선에는 거인족들만 사냐?-- 절로 어이가 없어진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죽이기에 혈안이 된 일본 극우들은 조선인들이 지진을 일으켰다며 '착한 조센징은 죽은 조센징이다.' 라는 헛소리까지 지껄이면서까지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관동 대지진을 조선인 학살 구실로 이용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유까지 적개심 고조 수단으로 쓸 정도였으니 그만큼 일본 사회가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히스테리에 빠졌다는 반증이다.

더우기, 불과 2년 전인 1921년에 실제로 조선인 이판능연쇄살인을 저지른 예가 있었으며 조선인들의 반발로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동하기는 더 쉬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대개 목조 건물을 짓고 사는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매우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여자들은 윤간당하였다.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이따금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십오 엔 오십 센) (じゅうごえんごじゅっせん)이나「大根」(だいこん)등의 단어를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유튜브에 올라온 십오 엔 오십 전(영상 내 오십 원 오십 전)에 관한 영상][*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어 실력이 능숙한 사람도 때때로 낚이는 경우가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지방 출신 일본인이나 관련 발음이 어눌한 일본인도 (특히 도호쿠벤을 쓰는 사람들) 학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고대 구약성서 십볼렛의 사례처럼 전 세계적으로 발음이 이상한 외부인을 살해하는 악습이 있었는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밧줄로 한데 묶어 강물에 던지고는, 헤엄쳐 나오려는 사람들은 도끼로 찍어 죽였으며, 임산부 역시 강간하고 죽창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심지어 죽지 않은 사람들은 산 채로 기름을 부은 뒤 태워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사태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는 일본 경찰은 학살에 묵인하거나 동참하였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 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한 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학살을 주도해갔다.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요코하마 쓰루미 경찰서의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 서장처럼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도 없지는 않으며, 계엄 출동 중인 일본군이 자경단을 직접 공격, 해산시키고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없지는 않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황도파를 비롯한 군벌이나 제국주의적인 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이었고, 이 난리통에 조선인들을 보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아키야마 요시후루 같은 경우는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 건 정신력이 나약해서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훈시했으며, 극우파이자 일본 국가사회주의의 거두였던 기타 잇키 같은 경우는 무정부주의자이자 훗날 천황 폭사기도 사건의 주역인 박열에게 피신처를 알선하였다. 도쿄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다급한 박열은 기타 잇키를 찾아갔고, 기타 잇키가 피신처를 알선해준 것.[*참고로 이 기타 잇키란 사람은 2.26 사건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으로 동참했다가 쿠데타 진압 후 황도파 장교 20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극우 제국주의자들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극우 제국주의들조차 비판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 학살에 대한 일본 극우 일부가 가진 반감은 극우의 특징인 파시즘을 생각하면 이해못할 현상이 아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영토였다. 따라서 조선인은 명목상 천황의 신민이자 2등 신민은 되는 존재였고, 이는 일본이 조선 황실을 '이왕가'로 삼아가며 일본 황실에 편입했던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것은 천황의 신민이 (급은 낮더라도) 같은 천황의 신민을, 천황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학살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는 셈이라, 아이러니하게도 극우주의자들에게는 반국가적 불충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피난에 가까운 귀국을 하였는데, 사태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유한 상인들조차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귀국했을 정도이다. 특히 집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아예 가져올 수가 없으니 급매 그런 것도 못 하고 귀국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일본으로 가는 게 쉽던 시절이 아니라 일본에 가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다. 결국 이들의 부동산은 일본 정부일본인들 소유가 되었고 재일 조선인들은 1원 한 푼 못 받았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체제 전반의 혼란 가능성까지 엿보이자, 경찰과 군부가 나서서 학살을 금지하며 자경단을 저지하고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 서울로 치면 한강 격.]과 아라카와강이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자업자득인지 스미다강은 22년 뒤에 일본인을 태우거나 삶아 죽인 강이 되었다.[* 공습을 피해 강물에 뛰어 들어지만, 네이팜탄의 화염으로 인해 펄펄 끊여 놓은 스미다강물에 삶아 죽어 학살당한 조선인 숫자보다 더 많이 죽었다. 물론 밖에서 죽음의 천사가 낳은 네이팜탄 화염에 전부 삼켜 버렸지만...]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고 조선인 학살을 막았다. 그러나 시작부터 관제언론을 이용해 학살을 부추겼고 피해자의 수를 축소발표했으며,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했다.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결국엔 학살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기구는 전혀 없었다. 단 한 사람, 일본 국적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전후 한국 언론에 사과하였고 그는 이 밖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2004년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는 2003년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 사죄하고 원인규명에 나서라고 권고했으나, 고이즈미 정권은 이를 무시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불안 속에 외부인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유언비어에 의해 발화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버리는 살인,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근세의 마녀사냥과 현대까지 이어지는 집시 핍박이 같은 부류에 들며 특히 작은 사회에서 더 빈번하고 끔찍하게 일어난다. 조선에서 찾아보자면 비슷한 사례로 만보산 사건이 종종 언급된다. 여기선 가해자가 조선인들이고 피해자가 중국 화교들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전 한국 교과서 등에는 이 조선인 학살극의 피해규모를 6천여 명으로 수록했다. 다만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수치에 대해 논란이 생겨났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학살 문단 참조.

이때 재일 조선인뿐만 아니라 재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였다. 굳이 발음이 아니더라도 도호쿠 사람들 중에는 성씨가 金인 사람들도 더러 있는지라[* 100% 일본인인데 金씨일 경우 콘, 콘노 등으로 읽는다.] 얄짤없이 희생당했다.

일본군이 개입된 학살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관동 대지진/일본군의 학살)]

사회주의자 테러

일본군일본 경찰의 학살 직접 참여의 경우 대부분 조선인 학살을 틈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 및 헌병대에 요주의 대상으로 등록된 (주로 좌파 계열인) 운동가를 죽이고자 한 것이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된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라사와 게이시치나 야마기시 사네지, 스즈키 나오가즈, 가와사키 진이치, 요시무라 고지, 가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 인사인 우치무라 간조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자,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헌병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게다가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하였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출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이중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헌병대에 의해서 일가가 참살되고 우물에 던져졌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의 책임자는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이며, 이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만주국으로 건너가 여러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주로 영화 제작)에 가담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열연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

또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알아주는 문제 중 하나인 덴노의 통수권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법리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바로 덴노의 대리인으로서 임무에 나선 군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덴노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는 논리로 변론한 것. 이전에도 이미 군 통수권 행사에서 군의 독주는 어느 정도 확장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제 일개 대위조차도 덴노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었다.[* 재판 자체에서는 당장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이후 종범들을 대상으로 열린 별도 재판에서 이 논리가 제기되면서 병사들은 완전 무죄 방면되었고 장교들의 지휘책임 역시 묵살되었다. 이후 이 상황을 신병 정신교육 시간에 강조하면서, 병사는 무조건 덴노의 대리인 장교의 명령에 천황의 명을 받들듯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했다. 이는 훗날 2.26 사건 등의 군사반란 상황에서조차 장교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작가 나카지마 아쓰시는 칸토대지진이 있은 지 얼마 안 돼서 《순사가 있는 풍경》 이나 《호랑이 사냥》 과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이 느낀 정체불명의 공포감과 당시 조선인들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져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학살의 규모

학살된 한국인의 수가 자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정확한 피해자의 수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의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 6661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711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PDF 참고 [[1]]]

그런데 2013년 6월, 53년도에 한국 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피해자 318명이 기록되었다.[[2]] 하지만 이 인원은 남한의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6.25 전쟁 중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한 결과라서 실제보다 숫자가 적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설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는 독일 외무성 자료가 발굴되었으나,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2만 3058명이었다" - 연합뉴스 2013년 8월 21일] 독립운동가들이 학살 4개월 후에 작성된 최종 보고서 형태인데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거부해서 조사를 못 하게 방해했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 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피살자는 198명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일본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3]]

2014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91주년을 맞은 일본은 일본의 가해 역사 기록자료가 모인 '피스 오사카' 전시관의 개편 공사로 관동대학살과 난징대학살 등의 자료는 전시관에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4]]

매체에 반영된 관동 대지진

* 소설 《토지》에서는 학살과 동시에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오가다 지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 소설 《마사코의 질문》에도 이 대학살이 표현되었다.[* 교과서에 수록된 것으로 인지도가 높은 단편 '방구 아저씨'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소설 속 단편인 '꽃을 먹는 아이들’의 주인공인 일본인 겐지가 조선인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있어 말을 붙이려고 따라가던 중 이 지진이 났고 그 사이에 폭도들이 몰려들어 겐지는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한다. 작중 겐지는 초등학생밖에 안 되었다. 겐지를 살해한 사람들은 겐지에게 역대 천황의 이름을 외워보라한 후 말더듬이 겐지가 더듬거리며 천황 이름을 못 외자 즉시 살해해버린다.
* 《데빌 서머너 쿠즈노하 라이도우 대 아바돈왕》에서는 칸토 대지진이 없어 다이쇼 20년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 《아리랑》에선 한국인 학생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 사장이 "우리 가족을 건드리느냐!"라며 폭도들의 난입을 막는다.
* 영친왕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인 《무지개를 이은 왕비》에서는,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듣고 영친왕이 뛰쳐 나가려다 아랫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한 뒤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금이나마 다룬 몇 안 되는 일본 작품이라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극중 영친왕의 행동은 픽션.
*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드라마가 있는데 배우 서인석씨와 이희향씨의 주연으로 나온 미니 시리즈 드라마 《왕조의 세월》 에서도 영친왕이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죽은 조선인들의 원혼에게 자신들을 구해지 않았냐는 원망을 듣는 상황의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장면으로 관동대지진의 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표현하였다.
* 일본인 소설가 나카지마 아쓰시의 《순사가 있는 풍경》은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 재일교포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쓴 《연애소설》의 단편 〈꽃〉에서는 등장인물 도리고에 씨의 조부가 대지진 직후 이웃에 사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말리러 나갔다가, 사회주의자로 몰려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후손인 도리고에 씨는 '납득할 수 없는 것'과 싸우기 위한 직업을 경찰에서 변호사로 바꾸었다.
* 피타텐에서도 배경 스토리에 이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아는 당시 도쿄의 요정으로 팔려가 일하고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다 개박살나면서 타로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결혼한다.]
* 할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이라는 추리만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관동 대지진과 학살이 나온다. 조선인 여인이 우물에 빠져죽은 사건이 있었고 아직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범인을 추리, 사건을 해결한다. 근데 조선인이 우물에 빠져죽어 우물을 못 쓰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발언이 왜곡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학살이 시작된다. 어린 할아버지는 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기력했고, 소문의 원형이 되는 발언이 자기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이를 밝히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했던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이를 들은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서는 일본 최대 최악의 흉령 나키리 쿠보가 관동 대지진을 일으킨 원흉으로 등장한다.
* 리비아썬에서는 [* 부시를 닮았다(...).]에 의해 사카노우에 타케루가 이 사건을 환상으로 겪게 된다.[*스포주의 물론 조선인은 아니고 네눈박이라서 괴롭힘을 받다가 조선인에게 구해지는 일본인으로 체험하게 된다.]   
*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충원이 90년대 초 출간했던 어린이 교육서적인 퀴즈탐험 한국의 역사 3권에서 관동 대지진 문제가 나왔는데, 이때의 삽화가 어린이 삽화 치곤 제법 소름끼치게 그려졌다. 폐허가 된 거리에 쓰러진 조선인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려는 일본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구도로 그려지고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서 어른이 봐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 일본의 소설 제노사이드에서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또하나의 끔찍한 '제노사이드' 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옹호하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주인공의 고등학생 시절 회상 장면과 함께 나온다.
* 다이쇼 소녀 전래동화에서도 등장했지만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고 그냥 이름만 나오고 강도가 심한 지진이라는 것에만 끝났다.
* 프롤레타리아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장편소설 《전형기 사람들》[* 작가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했기 때문에 미완으로 남아 있다.]에서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홋카이도 대학생들의 군사교련 반대 운동을 다룬 대목에서 정기 발화연습[* 사격훈련의 일종으로, 실탄 없이 화약만 넣은 상태로 실시하는 훈련이다.] 도중 육군 예비소령인 교관이 '불령한 조선인들이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폭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진압하라'는 취지의 지령을 내리자 학생들은 그런 모멸적인 지령에 움직이는 것은 수치라며 집단으로 반발하고 이것이 후에 군사교련 반대 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작중 학생들이 교관에게 반발해 대오를 흐트리는 장면에서 "모두에게는 관동대지진 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기억이 또렷했다."라고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비록 짧은 언급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1930년대에 쓰여진[*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931년에서 32년까지 쓰여진 분량이다.] 소설임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이렇게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사족으로 고바야시 다키지는 작품 곳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전술된 《전형기 사람들》에서는 직접적으로 오타루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고, 대표작인 《게 가공선》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하층 노동자들보다도 더욱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서사가 잠시 나온다.]
* 일본침몰 만화판에서는 관동 대지진을 언급하면서 제2차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학살의 대상이 조선인에서 불량해보이는 청년들로 바뀌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 영화 박열에서도 관동 대지진과 학살이 묘사된다.
* 가상역사물 재벌강점기에서는 주인공 어진이 관동 대지진을 대비해 일본에 거대한 돔을 지어서 대피소를 만들고 구호물자도 구비, 오세창과 전형필이 모아온 문화재들까지 보관해놓는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자 구호물자들과 의료용품들을 풀고 조선인 구조대원들과 의사들,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의사, 간호사들의 활약으로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서 자경단이 오히려 미즈노 렌타로가 쓴 공문[* 조선인이 폭행을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으니 조선인들을 학살하여 애국을 보이라는 개소리.]에 분노했다.

기타

칸토 대지진이 난 직후 미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파일:attachment/관동 대지진/관동대지진.jpg

그러나 18년 후.....

대지진으로부터 1주일 뒤인 9월 8일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미 해군의 클렘슨급 구축함 수 척이 집단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주된 원인은 궂은 날씨로 인한 시계 악화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거칠어진 해류와 파도 역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는, 일본이 반출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고 대출본 47권만 살아남았다. 이 대출본 47권은 2006년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에 해당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모 참의원이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1년 초 관동 대지진에 맞먹는 규모의 대지진이 도호쿠에서 일어났는데, 트위터에서는 "재일 조선인(한국인)과 지나인(중국인)이 우물 물에 독을 타고 혼잡한 틈을 타서 부녀자강간하기 쉽습니다. 조심하세요."라는 식의 자아비판 드립을 치기도했다. 혐한우익들의 선동이 아니라 자아비판성 드립이니 절대 혼동하지말 것. 21세기에 우물드립을 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트윗한 사람도 언급한 부분.

일본 영화계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어린 시절 이 지진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한번은 군중들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이 낙서가 증거다!'라고 선동했는데, 정작 그 우물의 낙서는 아키라가 장난삼아 의미없이 그린 것 뿐이었다. 또한 아키라의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오해를 받아서 집을 자경단이 포위했는데, 아버지가 당당하게 호통을 치자 자경단은 스스로 물러났다고.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지진이 발생한 후 자경단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 참상을 목격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고, 평생 자경단 참가의 경험을 후회했단다.

매년 9월 1일이면 추모식을 가진다. 크게 치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수준으로 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나마 일본 공산당이 추모식에 당대표부터 중의원, 지방의원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꾸준히 관심가지고 있으며 가끔 입헌민주당에서 개인 자격으로 오기도 한다. [include(틀:지진/20세기)]

분류:지진/일본분류:다이쇼 시대분류: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