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역사

From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include(틀:동남아시아의 역사)] 캄보디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Include(틀:캄보디아의 역사)]

[목차]

고대: 쩬라, 크메르 제국

역사로 따진다면 정말 굴곡이 많은 나라이다.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2,000년 전 프놈(រភ្នំ)이란 나라가 세워졌는데[* 한자어로 부남(扶南) 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이 나라 구성원이 현대 캄보디아인의 선조(오스트로아시아인)인지 아니면 참파와 동일한 오스트로네시아인인지 논란이 있으며, 둘 다 살던 다민족 국가란 설도 있다고 한다. 프놈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고, 상업으로 잘 나갔으나 비교적 내륙 쪽에서 시작된 쩬라(ចេនឡា, 진랍, 眞臘) 왕국에게 밀리기 시작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이후 부남을 밀어냈으며, 이때부터 확실한 크메르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8세기 쩬라는 내륙의 육쩬라(陸眞臘, 육진랍)과 바닷가의 수쩬라(水眞臘, 수진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수쩬라는 인도네시아자바 섬에게 시달리곤 했으며, 아예 자바에게 복속되기도 했다. 그러다 자야바르만 2세(ជ័យវរ្ម័នទី២)가 자바로부터 독립한 후 육진랍까지 통합해 9세기 앙코르 왕조의 크메르 제국이 세워진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6px-Map-of-southeast-asia_900_CE.png width=894

이렇게 세워진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를 호령하고 유구한 문명을 이룩한 크고 아름다운 대제국이었다. 캄보디아의 대명사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들도 이 시기 세워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는데 금과 보석으로 도배를 했다는 중국 사신 주달관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그러나 엄청난 절들을 지으면서 13세기에 국력이 좀 약화되는 듯 하다가, 왕위 친탈권이 심해지면서와 동시에 태국(씨암)이 독립해버렸고 캄보디아를 털었으며, 이외 라오스(란쌍) 등에도 독립국가가 세워졌으며, 왕조가 기울어 가면서 잘 가꾸어진 관개 시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자연 속에 묻혀졌다. 이런 식으로 지금의 캄보디아는 코친차이나, 타이의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상실했다. 결정적으로 1431년 태국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가 작살나버리면서 염병이 들끓는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함으로써 크메르 제국은 사실상 종결된다.[* 이후 폐도(廢都)가 된 앙코르는 밀림 속에 관리가 안 된 채로 처박히고 주변 토착민들이나 아는 곳이 되었다가 후대 프랑스인 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중세: 후기 크메르 왕국

파일:external/2.bp.blogspot.com/Khmer+empire+at+war+with+Thai.jpg

이후 캄보디아는 암흑시대로 일컬어질 정도로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서양 학계에서는 아예 후기 크메르 시기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앙코르 천도 후 크메르는 몇 군데를 거쳐서[* 이중에 그나마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가 프놈펜 서북부의 껌뽕짬 주에 있는 우동이라는 도시이다. 앙코르나 웬만한 관광코스를 다 둘러보고 어딘가 좀 더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짝독목(현재 수도인 프놈펜)까지 천도했다. 설상가상으로 침공하러 온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두 장군을 역관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조공을 보내느라 국고가 바닥이 나버렸다.

물론 그 후로도 태국에게 툭하면 얻어터지는 샌드백…가끔씩 반격하긴 했는데 더 맞았다.(…) 필리핀스페인인이나 마카오포르투갈용병을 고용해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무역으로 먹고살긴 했으며, 내륙의 수도 프놈펜보단 바닷가의 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런 캄보디아는 태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베트남과 친하게 지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태국이랑 더불어 캄보디아 전토를 집어삼키려 든 베트남까지 끌어들이는 꼴만 되고 말았다. 17세기부터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응우옌 씨가 참파를 병탄하고 계속 세력확장을 위해 캄보디아에 쳐들어왔다. 마침 캄보디아의 내분과 캄보디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의 협조가 겹치면서 응우옌 씨는 코친차이나를 점령했다.[* 지금의 호치민시(구 사이공)를 비롯한 베트남 남부가 원래는 캄보디아의 남부 땅이었다.] 더불어 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 서남부 해안지대까지 빼앗는다. 그리고 태국도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엄리업 지역을 뜯어갔다. 마침 캄보디아가 혼란에 빠지자 1772년엔 프놈펜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거의 속국 수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속국도 되었으며, 더 나아가 베트남에 의하여 꼭두각시 여왕이 세워져 심지어 진서성(鎭西城:쩐떠이성), 프놈펜은 진서부(鎭西府:쩐떠이부)로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인의 봉기랑 합쳐서 태국이 베트남을 몰아내고 다시 캄보디아를 속국처럼 만들었다. 결국 캄보디아는 태국에는 1년, 베트남에는 3년에 한번씩 조공을 하는 속국~~셔틀~~이 되어 완전 종속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태국이랑 베트남은 메콩강(구룡강)을 경계로 캄보디아를 분할하자고 꾸미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가뜩이나 철천지 원수인 태국베트남 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것. 특히 남부 베트남에서는 원주민이었으나 월족에게 밀려나 버렸다.[* 사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중국 남부의 광시좡족자치구에서 기원한 월족이 남하하면서 참파와 크메르인을 밀어 내고 개척해오는 역사다.]

서쪽과 북쪽은 태국이 동쪽과 남쪽은 베트남이 호시탐탐 노리고 국력이 발달치 못하였으며 캄보디아 내부의 결속은 왕위계승으로 혼란하여 양국이 내정을 간섭하다 못해 걸핏하면 충돌하고 땅까지 삥뜯었으니 이러한 정세가 이어졌다면 캄보디아는 태국이랑 베트남에 분할되어 멸망해서 아예 19세기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와 독일의 속령이 된 폴란드처럼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근현대: 프랑스 식민 시기와 독립

그런데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태국&베트남 입장에서는 천재지변.] 바로 프랑스의 동남아 침략 및 식민지 건설

캄보디아는 태국이랑 베트남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자진하여 프랑스에 보호를 청하게 된다. 캄보디아 국왕은 1853년 프랑스의 보호[* 말이 보호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를 바 없다. 을사조약 이후의 대한제국 같아 보여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부하고 저항한 끝에 합병을 당한 것이라면, 캄보디아는 프랑스가 오기 전부터 국력이 너무나도 허약해서 타국의 식민지라도 되지 않으면 민족 보존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대략 비유하자면 구한말때 대한제국보다는 후삼국시대 말기 나라를 고려에게 자진해 바쳐 고려에 합병, 소멸된 신라와 비슷한 상황.][*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태국등 두 적대국가들 사이에 끼어 멸망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고 이 당시 다른 제3자인 프랑스에게 보호를 청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던데 반해, 후삼국시대 당시 신라는 경주와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한반도 영토들을 잃고 크메르 제국 멸망 이후 캄보디아와 비슷하게 고려와 후백제 양강들 사이에 끼인 약소국으로 전락했었지만 후백제와는 외교적으로 앙숙이었던 것과 달리 고려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고 한반도의 정세가 고려와 후백제 간 고창, 운주 전투에서 고려에게 유리해지자 같은 한반도 역내 국가인 고려에 합병한 게 차이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로 같은 동족 의식이 없었고 언어적, 문화적으로 아예 이질적인 외세로 여겼던 캄보디아와 베트남, 라오스, 태국등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그나마 태국과 라오스는 언어적, 인종적으로 비슷한 타이족 계통이긴 하다.) 후삼국시대 당시 한반도의 신라와 고려, 후백제등 후삼국의 왕조들은 서로 적대하고 싸우기는 했었으나 언어적, 민족적으로 한 동족이라는 의식이 존재했었다.]를 요청했으나 태국에 의해 좌절되었다가, 1863년 다시 보호를 요청해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옆나라 태국에게서 시엠렙 땅을 좀 뜯어서 캄보디아에게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베트남으로부터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뺏어서 캄보디아에 돌려주었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캄보디아는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절반 가량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캄보디아 영토를 불려준 것은 어디까지나 식민통치를 위해서 였을 뿐,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열등한 흑인종으로 취급하여 친불 베트남인 부역자에게 통치를 맡기기도 하였다. 또한 캄보디아는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동네라 프랑스는 별다른 개발도 하진 않았고, 그나마 철도가 좀 깔린다거나 길이 좀 생긴다던가 하는 것뿐이었다. 이후 캄보디아는 고무와 옥수수 재배지가 되었으나, 이마저도 대공황 이후 또 망했다.(…) 또한 아직 군주가 남아 있어 완전히 나라가 망했다기에도 애매하고 교육수준도 낮았던 캄보디아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도시의 엘리트 중심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모두 일본이 점령했기 때문에 일본의 관할하에 있다가 일본이 패배하고 1953년에 캄보디아 왕국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참조.

캄보디아 왕국 (1953~1970)

자세한 내용은 캄보디아 제1왕국 문서를 참고할 것.

크메르 공화국 (1970~197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Khmer_Republic.svg.png 크메르 공화국 국기

시아누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지식인과 반대파를 숙청했다. 이에 공산 세력들은 무장 투쟁으로 돌아서면서 캄보디아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시아누크는 자국에서의 공산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탄압과는 별개로 자국 내 북베트남의 군사 활동을 묵인하거나, 미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친 공산 노선으로 기울면서,[* 시아누크는 실제로 쿠데타가 터지자 북한(!)으로 망명해 초대 김씨 왕의형제를 맺었다는 얘기도 있고 왕위에서 내려와 여생을 보냈던 2000년대에도 요양차 베이징에 자주 들렀다.] 군부 지도자 론 놀과 우파 쪽은 시아누크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결국 1970년에 론 놀과 국회에서는 시아누크가 해외 순방을 하는 동안 시아누크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베트남에 인접한 동부 캄보디아 지역(지금의 쓰바이리엥과 껌퐁짬, 몬덜끼리 지역)이 북베트남 쪽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데다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가 농촌 지역의 지지[* 민족의 상징이었지만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적의 적은 나의 편!]를 기반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당시 캄보디아에 대규모 폭격[* 이 폭격을 두고 1차 킬링필드라 부르기도 한다.]을 하였으나 군사적 성과는 별로였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민간인 피해만 늘어나서 반미적이던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 크메르 루주에게만 도움을 준 꼴이 되었다. 거기에 쿠데타로 새로이 세력을 잡은 론 놀 정권도 삽질을 연달아 하고 있었던 덕분에 사실상 크메르 공화국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고 결국엔 1975년에는 수도 프놈펜과 그 외곽 지역만이 크메르 공화국의 영역이었다.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고 크메르 공화국은 사라졌다. 이때 론 놀은 국외로 탈출했고 총리였던 시소와트 시리크 마타크,[* ស៊ីសុវត្ថិ សិរិមតះ. Sisowath Sirik Matak, 시아누크의 사촌동생으로 그가 탈출 권유를 거부하면서 남긴 편지는 80년대 한국의 고교 교련 교과서에도 나와 자주국방 예시로 쓰곤 했다. 당시 교과서에선 미국만 믿다가 망쳐버린 내 자신을 용서 못하기에 총리로서 조국에 남아 죽겠다는 마다크(여기선 이름이 마다크로 나왔다.)의 편지글로 나와 있었다.] 론 논(론 놀의 동생), 롱 보렛 등 론 놀 정부의 수반 대다수는 탈출 권유를 거부하고 남아있다가 크메르 루주에게 처형당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 체제에서 시아누크 왕의 손자 및 핏줄 14명이 처형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시아누크의 계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1976년, 크메르 루주는 캄푸치아 민주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캄보디아에 본격적인 생지옥이 시작됐다.

크메르 루주의 지배 (1975~197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Democratic_Kampuchea.svg.png 민주 캄푸치아 국기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의 주요 대도시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농촌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 그 시절 영상기록을 보면 심지어는 총으로 위협해서 그냥 집에서 무작정 끌어 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전국의 대도시가 유령 도시화되었으며 수 일 이내로 프놈펜에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미군의 폭격이 우려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식량을 운송할 수단이 없다는 게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정치적인 의도도 존재했고 농업을 매우 중시하는 폴 포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강제이주당한 과거 도시민들은 '새로운 사람들'이라고 불리며 매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배급되는 식량도 제일 적었고 불시에 처형당할 수도 있었으며,[* 론 놀 정권 하의 군인, 관료 등은 최우선적으로 처형당했다.] 폴 포트 정부의 야심찬 정책들에 맨 먼저 소집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해야했다. 그 반면에 농촌에 계속 거주했었던 '옛 사람들'은 대우가 좋은 편(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과 견주면 좋다는 것이다.)이었고, 강제로 이주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협력한다는 전제 하에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화폐가 사라졌다. 모든 상업과 무역은 사실상 중지되었으며, 사람들은 배급받는 을 양철로 재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일부는 귀금속이나 개인 소지품을 물물교환하기도 했다. 우표 및 전화 역시 사라졌다. 1978년 4월 1일에 우표 5장이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실물은 당연히 없다. 세계 우표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도시전설, 아니,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급. 더욱이 외국과의 교류란 폴 포트, 키우 삼판 등 정권 최고위층 중에서도 소수만 가능했다. 국제 무역은 사실상 중지였으나, 홍콩을 경유하는 3자 무역이 잠깐 행해지기도 했으며 주 교역국은 중국이었다.

이런 정책은 사실 공산주의/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1848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발표이래 수십, 수백가지 분파가 형성되었지만, 화폐제도의 폐지와 물물교환,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는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해야지만이 공산주의의 완성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폴 포트는 정통 공산주의 이론이 아닌 마오쩌둥의 농업 중심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여 그것을 마오쩌둥보다 더 엄청나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천했다.

의료 부분의 경우, 의사들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되고 의료 행위도 금지되었다. 고위 당 간부들은 상당한 수준의 서구 의료 기술과 의약품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효과가 떨어지는 전통 요법에 의존해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귀중품을 물물교환하여 아스피린이나 다른 단순의약품을 구했다.

종교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캄보디아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상좌불교의 스님들은 주직을 박탈당하고 노동 부대로 강제 편입되었다. 물론 처형된 사람도 많았다. 특히 주요 대상이 된 것은 크메르인들을 이끄는 지도자인 승려들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했다. 더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불교 자체를 탄압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승려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학살되었다. 이에 수많은 승려들이 탄압을 피하여 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특히 기독교이슬람은 외세의 상징으로 여겨 탄압이 더욱 극심하여 성직자들은 처형되었으며, 프놈펜에 있던 가톨릭-개신교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 금기인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제했고 물론 거부하면 처형되었다. 이중에서 특히 소수민족인 참족이 믿던 이슬람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참족은 현재에도 자신들의 원 고향인 참파가 있던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보다 캄보디아에 더 많이 살고 있는데[*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베트남의 학살 + 개종 + 추방.] 크메르 루주가 이들에게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이면서, 소수민족들이 주로 믿던 종교가 아닌 기독교보다 이슬람교가 더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반종교 +민족주의라서 더 심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다.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교육으로 1975년 이전에 교육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처형되었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육은 간단한 수학과 읽기 정도만 제공되었고 그 외에는 혁명의 의식을 심는 것이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폴 포트의 중요한 '군대'였으며 어른들을 감시하고 밀고했다. 그래서 21세기에도 캄보디아의 교육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리고 뚜올 슬렝(S-21 수용소)같은 강제 수용소에서는 생겨 반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다거나 외국의 스파이 등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을 가두어서 고문하고 학살했다. 훗날 '킬링필드라 불리는 대학살이였다.

베트남과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동부 지역에서는 쿠데타의 조짐이 피어나고 있었고, 실제로 미수에 그친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여파로 동부 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대부분은 베트남으로 도망쳤다.

베트남 통치와 캄보디아 내전 (1979~199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Kampuchea.svg.png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국기 (1979~198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State_of_Cambodia.svg.png 캄보디아국 국기 (1989~199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Cambodia_under_UNTAC.svg.png UN 과도정부 "UNTAC" 기 (1992~1993)[* UN기의 색상에 UN 로고 대신 캄보디아의 국토 형상과 크메르어 국명을 넣었다.]

크메르 루주는 잃어버린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훨씬 강대국이었던 베트남에 도발을 해댔다. 1978년, 캄보디아와 베트남간의 국경 분쟁이 베트남의 인내심을 넘어섰고 베트남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 공격을 결의하여 12월 22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12~15만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남동 지역에서 서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해나갔으며 17일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의 막장 짓거리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베트남군을 환영해주기도 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태국의 국경 지대로 도주하여,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다른 나라들과 합의하여 타이 국경지대를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게릴라전을 하였으나 이미 크메르 루주는 새로운 국가를 전복시킬 힘은 없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가 남아 있는 한 안정은 기대할 수 없었다.

파일:external/www.aboutasiatravel.com/mines-ordinance.jpg 캄보디아의 지뢰와 불발탄 현황. 서북부의 진한 빨간색 점이 지뢰 지대이다. 덤으로 오른쪽 아래의 빨갛고 노란 곳은 미군이 폭격을 하여 언제 불발탄이 터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

이 때의 여파로 캄보디아에서 타이 국경과 가까운 반떼이멘쩨이, 웃더멘쩨이 지역에는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바로 크메르 루주가 방어를 위해서 대규모로 지뢰를 매설했기 때문. 지뢰가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너무 많고 캄보디아의 경제상황도 막장이라 지금도 지뢰 제거는 요원한 상황이다.[* 지뢰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한 유적지도 많다. 2015년 현재 대부분의 민가지역과 유적지는 지뢰가 제거되어 일상생활과 관광에는 문제가 없다.]

하여튼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세웠으며,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한 헹삼린이나 훈 센이 지도자가 되었다. 앞에 설명했듯 크메르 루주는 일단 게릴라전을 벌였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15만여 명의 베트남군을 주둔시켰으며, 캄보디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베트남이 친중 성향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전복시키자 분노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중월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베트남은 고문관을 파견하거나 베트남인을 이주시키곤 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아들 라나리드와 1981년에 '민족통일전선(FUNCINPEC)'을, 손 산(1911~2000) 전 총리는 1979년에 반베트남/반공성향 단체 '크메르인민국가해방전선(KPNLF[* Khmer People's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세워 괴뢰정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제재당한 베트남은 동구권 붕괴와 캄보디아의 자치능력 형성을 이유로 결국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1989년 4월 30일에 국호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서 '크메르국'으로 바꾸고 FUNCINPEC, 크메르 루주, KPNLF 3개 정당의 논의 하에 제한적인 체제전환을 시도했다. 결국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또한 캄보디아 인민당[* 현재의 캄보디아 인민당은 동구권의 공산당 후신 정당들과는 달리, 특별히 지향하는 이념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92년에 UN에 의한 '국제연합 과도정부(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UNTAC))'라는 과도 통치를 거쳐 1993년 9월 왕정이 복고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던 나라중 유일하게 1992년 이후에 무너져 가장 늦게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나라다.

1993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첫 총선에서는 왕정주의적 정당인 훈신펙(គណបក្សហ៊្វុនស៊ិនប៉ិច)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캄보디아 인민당이 뒤를 이었다. 훈신펙의 로너릇과 인민당의 훈 센이 함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쿠데타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란했으며 양 계파 사이 충돌이 일어났다. 1997년 훈센과 노로돔 라나리드 총리 사이 무력충돌 사태가 일어나 결국 라나리드는 축출되었다.

캄보디아 왕국 (1993~현재)

1998년, 크메르 루주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캄보디아 서북부의 한적한 마을 안롱벵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어서 지도자였던 키우 썸펀과 이엥 사리가 훈 센 정부에 항복하였고 따목만이 크메르 루주 지도자로 남았었으나, 이 역시 다음해인 99년 항복하여 크메르 루주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재구성되어 망명중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맞아들여 정식 국왕으로 모시는 대신 실권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현재는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UN의 도움에 힘입어 ECCC라는 간판을 걸고 08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1]]

크메르 루주 재판 및 처리에 대한 건 크메르 루주 문서를 참고할 것.

한편 1997년부터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1977년 폴 포트에 반대해 캄보디아를 탈출한 후 베트남 괴뢰 정권의 지도자로 있던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 센 총리가 2016년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그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독재자란 평이 우세하다만 어쨌든 캄보디아 국내에선 경제도 살아나고 정치도 옛날보단 아주 안정된지라 지지받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2009년 그는 캄보디아를 독재정권이라 부르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으며, 또한 부자세습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독재 맞네~~

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가 [10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노로돔 시아모니가 뒤를 이었다.

[[2]]캄보디아 전범재판소(ECCC) 대법원이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킬링필드’를 집단학살로 인정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1979년 붕괴한 지 40여년 만이다.

[각주]

분류:동남아시아사분류:캄보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