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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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박인근과 함께 부산시의 수천명의 시민미성년자들을 납치강간하여 살해 후 수백명을 암매장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주범이다. 자신의 정권 유지에 누가 될까 두려워 박인근 사건을 덮어버렸다.


2009년 기아 우승 이후 야갤충들이 엠파커를 까면서 홍어를 땅크로 밀어버리는 짤이 도입되면서 야갤 및 합필갤, 정사갤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땅크성님이라고 빨기 시작한 것도 야갤이 시초. 다만, 일베와는 다르게 디씨의 게시판이 정치적 스펙트럼이 제법 넓기 때문에 언론이나 5.18 단체에서 부들부들하는 경우는 일베보다 적었다.[1]

일베에서도 전두환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나 2012년 대선 즈음에 땅크아트[2] 게시물들로 인해 일베 회원들에게 새로운 인상이 심어졌다. 처음에는 "컨셉이지 전두환을 진짜빠냐"는 분위기였으나 팩트를 찾아보니 하기 기술된 제5공화국시절의 경제 업적이 재조명을 받게 되었고, 일베 회원들의 전두환에 대한 이미지가 급반전하게 된다. 마침 그 순간을 노린 시스템클럽 회원들의 난입으로 전두환을 진짜로 빠는 인간들이 늘어났으며, 5.18 북괴개입설 또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두환의 최대 잘못은 5.18 광주 혁명이 아니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홍어요리 전문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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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절때 전차를 몰고 산체로 전차 캐터필러로 홍어산적을 수십수백개씩 만들어낸 경력이 있다.

공수부대를 이용해 하늘에서 내리는 수십 수백개의 M16롤러로 떡갈비를 만들어낸 경력이 있다.

특징

  • 창씨개명을 안 하고 개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땅끄의 싹이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 땅크를 좋아한다카더라.
  • 자기 통장에는 항상 29만원밖에 없다 카더라<del>근데 이젠 그것마저 뺏기게 생김</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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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본인은, 본인은
  • 각하, 군대에도 각하께 충성을 바치는 심복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ref>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가 전두환을 정계에 진출시키려고 하자 전두환이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ref>
  • 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ref>"없잖아?" 라고 끝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ref>
  • 젋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좋은가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ref>이것만 봐도 전대갈이 얼마나 답이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 </ref>
  • 부대 열중쉬어
  • 이제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 하겠다 하면...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댕이가 큰사람이지 <ref>"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바로 전에 한 말이다.</ref>
  • 나는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 <ref>이것만 봐도 전땅끄가 얼마나 답이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2</ref><ref>수천억대의 추징금을 판결받자 "지금 당장 내 지갑에 29만원 밖에 없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017</ref><ref><s>뉴데일리는 믿을게 못된다</s> 그러면 추징금이나 빨리 내든지</ref><ref>본인 명의로는 진짜로 29만원밖에 없는 거 맞아. 문제는 자기 돈을 죄다 며느리의 명의로 해놨다는 거지.</ref>

군 경력

  • 1955년 소위 임관
  • 1956년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전속부관(중위)<ref>이순자가 이규동의 딸인데 이때 전두환을 처음 만났다. 이순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에 재학중이었으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전두환에게 시집갔다.</ref>
  • 1960년 서울대학교 ROTC 훈육장교(대위)
  • 1961년 중령, 전두환은 소령시절 없이<ref>세계적으로도 이렇게 진급하는 군인들이 가끔 있다. 러시아우주비행사이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밖에 나갔다 온 사람인 유리 가가린 역시 소련군 현역 공군 중위의 신분으로 우주에 다녀왔는데 출발할때 소련 정부에서는 가가린을 순직으로 처리한 뒤 2계급 특진시켜 놓았는데 가가린이 무사히 살아서 지구로 귀환하자 소령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고 또 중령도 건너뛰고 바로 대령을 달았다. 그리고 사망 후 소장(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준장)에 추서되었다.</ref> 대위에서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 1972년 베트남 파병부대 연대장(대령)
  • 1976년 청와대경호실 차장보(준장)
  • 1977년 1공수여단장(준장)
  • 1978년 1사단장(소장)
  •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소장)
  • 1980년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장 서리(중장)
  • 1980년 대장 예편

소싯적

전두환은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공업고등학교 출신인 데다가 고등학교도 연합고사가 아닌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축구선수<ref>전두환은 골키퍼였다.</ref>로 운동부라서 일자무식이었다. 때문에 영어는 늘 하위권이었고<ref>영어 전체 1등이라 임관하고 나서 육군대학 영어교관 보직을 받은 노태우와는 대조되는 대목이다.</ref> 항상 퇴교당할 위기에 몰렸다. 퇴교당하면 현역병으로 한국전쟁에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 위기들을 어찌어찌해서 잘 넘기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5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머리는 돌대가리였지만 리더쉽은 뛰어났던 전두환이라서 그의 휘하에 들어오려고 하는 무리들은 그야말로 바글바글했다. 심지어는 친구이자 육사 동기인 노태우도 전두환의 휘하였다.

전두환은 말년대위 시절에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전두환은 갑자기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후배 생도들을 다 끌고 나와서는 예복을 입혀놓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게 했다. 이에 박정희가 감동먹고는 전두환과 차지철 두 대위한테 정계진출을 권유했다. 차지철은 응해서 김두한과 나란히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군대에 남겠다고 했다. 이에 쿠데타가 안터졌으면 그 다음 보직이 직업보도반이었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 덕분에 소령 계급장은 구경조차 못해보고 대위에서 바로 중령에 진급했다. 육사 출신인데 대위 계급으로 직보반이라면 육사출신은 100% 중령에 진급하는 지금 기준이라면 어이없는 노릇이겠으나 당시에는 갑종장교가 육군사관학교보다 더 잘나가던 시절이었고 실제로도 전두환은 갑종 탈락해서 육사에 들어갔다.

베트남 전쟁

전두환은 대령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월남파병부대 연대장을 했는데 그야말로 보호관심장교였다.

날이 찌는듯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식수와 기름이 부족해서 병럭들은 허덕이는데도 정작 자신은 연대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온수샤워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 거기에 군공이 전혀 없어서 무기밀매상과 접촉해서 AK-47을 밀수한 뒤 이것을 적에게 노획했다고 구라를 쳐서 상부에 헌납했다.

그런데 이게 구라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베트남에서 전두환 대령의 행보가 완전히 보호관심장교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준장 진급에서 누락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인인지라 계급은 대령이어도 이후 보직은 준장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받았다. 이후 전두환에 대한 여론이 잠잠해지자 은근슬쩍 준장으로 진급했다.

차지철과의 관계

전두환은 박정희의 애완인간인 차지철과 같이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임관출신은 다르지만 군대 동기였고 둘 다 대위 시절에 박정희의 군사정변에서 공을 세워 나란히 박정희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서로 충성심경쟁을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훚앙을 빨아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친한척 하고 의형제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있게 되면 서로 상대방의 뒷담화를 깠다.

전두환이 차지철을 뒷담화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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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이 전두환을 뒷담화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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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차지철이 만났을 때의 대화

  • 전두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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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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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런 식이었다.

업적

Template:오른쪽의견 Template:팬 부릉부릉

땅크를 잘다룬다

부릉부릉

물가안정과 경제성장

흔히 전두환시기의 경제발전은 3저호황 덕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3저호황은 전두환 정권 말에야 시작되었고, 전두환 시기는 오히려 유가가 어느 때보다 비싼 시기였다. 70년대말 오일쇼크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전세계는 치솟는 물가상승에 고민이었다. 2차오일쇼크 당시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79년 18.3%, 80년 28.7%, 81년 21.4%로 미친듯이 치솟았다.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전두환은 경제관료인 김재익<ref>전두환은 개인적으로 김재익을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졌으며, 부패가 많았던 그 당시에도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후일 김영삼이 깜짝쇼 폭탄을 터뜨리는 금융실명제도 초안은 김재익이 내놓았지만 전두환에게 아부하는 무리의 방해로 빠꾸먹었다. </ref>, 사공일에게 경제전권을 위임시켰다. 좌좀들은 "전두환이 아니고 김재익이 살린거네"라고 전두환의 업적을 부인할수도 있겠지만, 어떤 인재를 기용하여 어떤 위치에 적재적소에 배치할지 결졍하는 용병술은 고평가될 만 하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의 모든 부문을 정부 통제하에 두려고 했기때문에 부작용이 심했고 물가는 오히려 더 뛰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당시에는 경제성장률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물가가 폭등하는 와중에도 대기업지원을 위해 통화량 환수에 주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시기에는 반대로 중소기업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전환했고, 통화량을 대폭 축소시켰다. 가격기제도 정부가 마냥 통제할게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를 이용한 대규모수입을 통한 물량공급으로 해결했다.

81년에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전두환은 물가안정에 주력했다. 결국 82년의 물가상승률은 전년의 21.4%에 비해 7.2%로 낮아졌다. 그리고 노태우가 집권하기 전인 88년까지 물가상승률은 5%를 넘지 않는 물가안정이 유지되었다.(83년 3.4%, 84년 2.3%, 85년 2.5%, 86년 2.8%, 87년 3.0%)

서민경제 살린 대통령

KDI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82년부터 지니계수와 상대적 빈곤률은 하강곡선을 그렸다. (이 추세는 9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김영삼이 집권한 시기부터는 다시 상승했다.) 80년대의 지니계수

2005년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기업수익구조의 변화와 시사점"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8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8.7%을 기록했고, 개인수익 상승률은 9.9%에 다다랐으나 기업은 6.1%에 그쳤다. 그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70만원이었는데 당시 공사판 임금이 5~8만원이었으니, 열흘 일하면 등록금을 버는 셈이었다.<ref>반면 2000년에서 2003년에 와서는 개인수익 상승률은 0.3%에 그쳤으나 기업의 수익상승률은 무려 62.6%을 찍었다. 이 시기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서민<s>과 북한</s> 살리기 운운하던 김대중노무현이다.</ref>

단위:% / 한국은행, 기업수익구조의 변화와 시사점, 2005.2
1980년대 1990~1996년 2000~2003년
경제성장률 8.7 7.9 5.6
개인 9.9 6.6 0.3
기업 6.4 4.3 62.6

법치 질서 확립

전두환은 노태우가 했던 범죄와의 전쟁의 원형이 되는 각종 법안을 도입했으며 실제로 이윤상군 유괴사건 당시에는 사건수사에 전두환이 직접 관여함은 물론 사건수사 도중에 형법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이윤상 소년<ref>사건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서 절름발이였다.</ref>이 유괴당하자 전두환은 방송에 나와서 다음과 같은 대범인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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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윤상 소년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범인은 이윤상 소년이 다니는 학교의 체육교사인 주영형(당시 30세)<ref>서울대학교 ROTC출신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던 당대 기준으로 엄청난 엘리트였으나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당하고 1천만원(당시의 1천만원이면 집 한채 값이었다.)의 빚을 지자 여제자 2명과 같이 이윤상을 납치했다. 이윤상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쉽게 잡혔다. 이외에도 주영형은 유부남에 슬하에 자녀가 2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여명의 여제자들과 불륜관계를 맺었는데 그 중 가장 만만한 2명을 범행에 가담시켰다.</ref>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전두환은 직권으로 아동유괴살인은 무조건 사형으로 법을 뜯어고쳐버렸고 보통 사형수가 되면 1년 정도 후에 집행하는데에 비해 전두환은 주영형을 단 열흘만에 사형을 집행시키는 기염을 토해서 아주 본때를 보여줘버렸다. 주영형의 사형이 집행되자 전두환은 또다시 대국민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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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형의 강요에 의해 범행에 가담한 두 명의 여중생들에게는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교도소에 쳐넣었다. 주영형을 검거한 경찰관은 그야말로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한 끝에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진급했다.

각종 규제철폐

통행금지가 해제된 시기도, 두발자유화, 교복자율화가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우민정치를 했다는 비판과 연계된다.

독립기념관 건설

일본이 역사왜곡을 시도하자, 국민성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건설했다. <del>정작 민주화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어떤분은 자기 도서관 짓기에 바빴지...</del>

평화의 댐 건설

북한이 금강산댐을 폭파시켜서 남한을 수몰시키려고 하자 이에 맞서서 국민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 <del>그런데 수고비가 너무 비쌌다.</del>

비판

Template:왼쪽의견 Template:비하 섬네일|마법의 지폐

외모

그는 대머리이다. <ref>이것만 봐도 전대갈, 전낙지가 얼마나 답이 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 (?)</ref>

낙지처럼 생긴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전낙지라고도 불린다.

연예인 탄압

배우 故박용식에 대해서는 자신이랑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연정지를 때려서 방송국 근처에 얼씬거리지조차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박용식은 할 수 없이 먹고 살기는 해야겠으니까 자기 집을 개조해서 방앗간을 차려서 목구녕에 풀칠해야만 했고 훗날 이걸로 사업확장을 시도해서 (주)세덴 이라는 자동차용품 중견기업의 회장이 된다.<ref>박용식이 살아생전에는 박용식이 회장이었으나 박용식이 죽은 후 (주)세덴 회장 자리가 한동안 공석이었다가 현재는 개그맨 엄용수가 (주)세덴의 회장을 하고 있다.</ref>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박용식은 주구장창 전두환 역할만 전담하는 배우가 되었다.

개그맨 故이주일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간첩으로 몰아서 코렁탕을 먹이고 방송출연을 금지시켰다.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영구제명을 때리고 출연정지를 먹였다. 훗날 심수봉은 영구제명에서 해금되어 다시 가수가 되었으나 신재순은 이에 대한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신재순은 그 이후 한국에는 단 한번도 귀국한 적이 없다.

이토록 전두환은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연예인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군내 사조직 결성

군대 안에서 '하나회'로 잘 알려진 사조직을 결성했다. 하나회 회원들의 대부분은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고 꿀보직에서만 뺑뺑이돌았고, 박정희는 군대에서의 자신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하나회를 옹호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었지만, 이 중에 전라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장세동이었다. 이 때문에 장세동은 은근히 따를 당하는 와중에 전두환이 자신을 감싸주니 12. 12 사태 당시 장태완을 버리고 전두환 편에 붙었다. 이들은 나중에 김영삼에게 싸그리 숙청당한다.

언론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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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두한 정권의 언론장악의 대표적인 상징인 일명 땡전뉴스. 9시 땡 치면 전두환을 찬양하는 기사부터 나온다고 해서 땡전뉴스라고 불렸다. 뚜뚜전 뉴스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땡전뉴스가 더 어감이 좋아서 땡전뉴스가 된 것 같다. 이걸 보면 북한에서 하고 있는 뉴스랑 별로 다른게 없다. 전두환이 뭐만 했다하면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전두환을 찬양하는 비디오를 보내곤 했다. 뉴스 시작 단골멘트가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 께서는..." 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호가 '오늘'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또한 이순자 여사는..."라는 말도 빈번하게 나오는 멘트였는지라 이순자의 호는 '또한'이라는 소리도 있다

추징금 미납

전두환은 2013년 현재 1673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하였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입 등으로 인해 잦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40600015&code=940202</ref>. 이는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의 결정을 한 뇌물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다.

16년동안 29만원밖에 없다고 드립을 치다가, 박근혜정부 들어서 처남 구속, 미납 추징금 환수 수사가 시작되면서 추징금을 자진납부 하려는 분위기를 잡았고 2013년 9월에 장남을 앞세워 대국민 사과를 하고 1천672억 원을 완납한다 카더라.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이 특별담화에서 밝힌 호헌을 위주로 한 정국운영방침. 이날 담화를 통해 전두환은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 제5공화국 헌법으로 88년 2월 정부를 이양할 것과 그에 따른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할 것, 그리고 개헌논의를 올림픽 뒤로 미룰 것 등을 밝혔다. 이러한 호헌조치에 대한 예상되는 반발과 국내외적 반응를 고려, 전두환은 지방자치제의 임기 내 단계적 실시를 시사했으나, 야당과 재야가 연합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6·10국민대회> 및 <6·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등을 주도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시위가 폭발했고, 이를 6월 항쟁이라고 부른다. 전두환은 이에 굴복하여 <6·29선언>을 발표, 4·13호헌조치를 철회하고 야당의 직선제 개헌안을 수락했다.

우민정치

Template:병림픽 3S (Sex, Sports, Screen)에 입각해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갖지 않게 하려고 문화 투자를 육성한 점이 크다. 업적 항목의 각종 규제 철폐도 이런 정책에 입각한다. 프로야구도 이 때 만들어졌다. <s>그래서 야빠들은 거진다 수꼴이다.</s> <ref>프로야구 뿐 아니라 K리그 (수퍼리그) 또한 이 때 만들어졌다. 전두환은 축구광이었으나, MBC의 의지가 하도 확고한데다 축구 프로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야구를 먼저 프로화시켰다 카더라.</ref>

3S 정책은 그 당시에도 주요 일간지에서 다루는 문제였다.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의 칼럼. 그리고 올림픽 개최 또한 일본의 대표 우익정객인 세지마 류조의 조언에서 비롯된 것이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서도 관계자들의 증언과 자세한 정황을 다뤘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덮으려고 하는 정부 음모라는 등' 운운할 수 있는데, 전두환 정권은 진짜로 음모가 횡행하던 때였다. 단순 부부싸움을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으로 조작한 수지 김 간첩조작사건이 그랬고, 평화의 댐 북한수공설이 그랬다. 하도 주작질이 많다보니 당시 안기부를 비롯하여 정부부처가 벌인 일 중에 국민의 의구심을 사지 않는 일은 없었다. 3S 산업도 이런 음모론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MB OUT이네 뭐네하며 트위터에서 떠드는 애들과, 나름 전문성과 증거까지 갖춘 대형 언론사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의 투표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정부이지만, 당시 전두환 정부는 명백한 군사정권이었다.

하지만 3S 산업 자체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덮으려고 하는 정부의 음모라는 등 개소리를 일컫는 좌좀들의 대표적인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문화 여가 생활의 발전은 불가피한 법인데, 이런 돈 되는 사업에 투자한 것이 삐딱하게 해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문화와 경제의 발전은 시민들로 하여금 음모론에 심취하게 만들어 더욱 더 정치에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군사정권이 없어지고 야구산업이나 영화 등의 재밌는건 남았으니 형편은 더 나아진 것 아닐까? 둘 중 뭘로 생각할지는 알아서 생각해라.

Template:팬 별개로 전두환은 이 야구산업 발전이 훗날 21세기 인터넷 악의 축(?) 야갤을 발생시킬 거라는걸 전혀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s>전두환의 본의아닌 또다른 만행</s>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1980년 70세 이상 노인에게 지하철 탑승요금 50% 할인을 제공하다가 1982년 65세 이상 50% 할인, 다시 1984년에 65세 이상 고령자와 국가유공자 완전 무료로 확대되었다.<ref>1984년 당시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건의한 대한노인회의 회장이 전두환의 빙부였다. 이것만 봐도 전낙지가 얼마나 답이없는 색히인지 알 수 있다4. </ref> 도시철도공사 측에선 위에서 까라니 까는 거고 정부 지원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푼도 없는 통에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가 된 지금은 어르신들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이 지하철 운영적자의 50~7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좀 다른 평가

Template:오른쪽의견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는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전두환 개인의 사람 보는 능력이나 부하들 부리는 능력은 좋았다는 평이 있다. 우선 그가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전방의 병력까지 무단으로 동원해가며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멤버들(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등)부터 시작해서 경제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ref>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이 사람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개인 가정교사 수준이었으며, 순직하게 되었을때도 전두환이 매우 슬퍼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래 살았다면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꿨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많다.</ref>, 김대중 사면 문제와 일본과의 경제차관 문제를 해결한 외무부 장관(이후 안기부장이 되었다) 노신영 등이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은 사람보는 눈이 없거나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못 하여 사건이 터지는 일이 많았는데<ref>대표적으로 이승만의 부하인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질러서 이승만을 그야말로 씨발새끼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노태우는 총선에서 패하자 타개책으로 김영삼과 손을 잡았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통수를 쳤고, 김영삼은 아들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IMF와 함께 평생 욕을 먹게 되었다. 노무현은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변양균이 학력위조자 신정아와 불륜을 저질러 온갖욕을 다 먹었으며, 문재인의 무차별 사면짓으로 욕이란 욕은 다 처먹었고 이명박은 형제인 이상득의 공천 문제로 보수를 분열로 만들고 박근혜는 윤창중 성추행 사건으로 정국이 뒤흔들리기도 했다.</ref> , 전두환의 경우 요직마다 인재를 등용하여 문제가 거의 없었다는 평이다.

잘 모르는 일에 나대지 않고 적절한 전문가에게 알맞은 일을 맞긴 것이 전두환의 리더쉽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김재익을 경제수석의 자리에 앉히면서 스스로를 굽혔을 정도로 자신의 '무능함'과 다른 이의 '유능함'을 인정했다. 이 부분은 본인 이미지와 안 맞게 쓸데없이 민주적이고 공정했다. 오히려 '민주화'된 이후에 자격없는 사람낙하산으로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s>물론 당연히 다른 부분에서는 민주와 자유 같은거 따위 모조리 땅크로 밀어버렸다.</s>

는 개소리

Template:왼쪽의견 전두환의 인사 관리에 문제가 거의 없다는 건 완벽한 개소리다. 전두환은 김재익같은 일부 예외를 제하면 주요 요직을 거의 대부분 전문가가 아닌 하나회 출신의 자기 인맥들로 꽉꽉 채워넣었다. 당연히 인맥과 빽으로만 올라온 똥별 출신의 돌대가리들이 행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리는 만무했고, 대통령 본인부터 시작해서 밑대가리들까지 경상도 특유의 지들끼리 헤쳐먹는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덕분에 제5공화국은 건국 이래 부정부패가 가장 심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 터진 세기의 초대형 금융사건인 장영자 사건과 나라에서 대통령 각하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기위해 애새끼들 코묻은 돈까지 강탈해간 평화의 댐만 봐도 전두환 집권기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재인과 더불어 역사상 최악의 측근 콩라인이리고 불리는 박지원의 탄생이 바로 전머갈 덕택이었다. 실제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측근은 문재인이나 박지원이 아니라 곽영주이다. 곽영주는 자기 주인인 이승만을 역사속에서의 평가를 쓰레기로 만든 놈이다.

기타

  • 제2연평해전이 벌어지고 윤영하 대위가 전사했을 때 그들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정작 민주화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어떤분은 이때 월드컵이라고 브라질과 나치의 경기를 관전하러 요코하마로 떠났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연평해전 전사자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

관련문서


<references/>

Template: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Template:일베 Template:디씨 Template:필수요소 분류:일베 떡밥 분류:디씨 떡밥 분류:살인 유경험자

  1. 지금은 정사갤이나 야갤에서 사건이 터져도 대충 일베충의 소행으로 묻어간다.
  2. SBS 인터뷰,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짤방을 난립하여 비디오 아트처럼 만든 게시물이다[1].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패러디인데, 후에 이 인터뷰 발언을 음원화하여 하여 일베내의 땅크상스와 함께 MC무현의 토대가 된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