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From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여정 주역의 영화, rd1=후궁: 제왕의 첩)] [include(틀:황실/왕실)]

[목차]

개요

後宮

동아시아에서 군주 이외의 여자들 중 내명부의 작위를 받은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비빈(妃嬪)[* 비(妃)를 왕의 처의 작위로 쓴 한국에선 비빈의 정의가 추가되어 왕의 정궁인 왕비와 빈 이하 모든 후궁을 아우르는 단어로 쓰이거나 왕의 정궁인 왕비와 세자의 정궁인 세자빈을 통합한 단어로도 쓰였다. 중국의 황실과 옛 국가, 고전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후궁의 의미를 띤다.], 빈어(嬪御), 잉첩(媵妾), 빈잉(嬪媵), 궁빈(宮嬪), 궁인(宮人)[* 조선에서 궁인은 후궁과 왕실 시녀를 모두 아우른다. 그러나 궁중의 여인을 총칭하는 궁녀가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정의되면서 궁녀의 같은 말인 궁인과 내인(內人: 나인)도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이해되고 있다.], 내관(內官)[* 후궁을 내관, 시녀를 궁관으로 구별해 부르기도 했다. 현대 국어 사전에는 내관은 내시를 지칭하는 단어로, 궁관은 궁내직 혹은 동궁 소속 관원으로 정의되고 있다.], 육궁(六宮)[* 《예기(禮記)》에 “옛날 천자(天子)의 후(后)는 6궁(六宮)·3부인(三夫人)·9빈(九嬪)·27세부(二十七世婦)·81어처(八十一御妻)를 세웠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육궁에 정궁이 포함되어 있어 내명부 후비(后妃: 정궁+후궁)의 다른 말로도 쓰인다.] 등으로도 불린다.

후궁의 본래 의미는 궁궐의 뒤꼍, 안쪽을 뜻하며, 후정(後庭)·내정(內庭)·내전(內殿)·내궁(內宮)·내조(內朝) 등을 쓰기도 한다. 제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고 의식을 행하는 영역의 다른 호칭인 외조(外朝)·외정(外庭) 등의 반대격으로, 제왕의 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 제왕의 여인(妻妾)이 거처했기에 제왕의 처와 첩 및 시녀(侍女)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이게 됐다.

이후 같은 의미인 내전과 후궁을 분리하여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처(皇后·王妃)로, 후궁을 제왕의 첩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 사례가 빈번해 현재 한국의 사전에선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정궁으로, 후궁을 제왕의 측실로 정의하고 있다.

후궁 제도의 특징

일부다처제의 관습이 존재했던 고대부터 있었던 제도였고, 더욱이 한 나라의 주인인 군주가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은 왕실이 가지는 위엄의 상징임과 동시에 군주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맺어 손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떨까[* 당시 고려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남성이 너무 부족해서 결혼을 못하는 여성이 많았다. 여자가 결혼을 못한다는건 전근대 사회에선 생존의 위협이 된다.] 얘기를 꺼냈다가는 미친 놈 취급 당할 정도로[* 대신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떻겠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저잣거리에서 부녀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던 고려에서도 "에이 그래도 왕은 예외죠"라며 후궁을 잔뜩 들였다.~~멀리 갈 것도 없이 창업 군주인 태조 왕건만 봐도..~~

또한 위엄과 동맹 외에 계승의 안정성을 위한 요소도 있었는데, 1명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보장되는 일이 아닌데다가[* 당장 현대에도 각종 고부갈등과 고민을 낳는 이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전근대의 높은 영아사망률까지 결합되면, 일부일처제와 적장자 상속제의 결합은 굉장히 불안정한 면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생아의 계승권을 거의 인정하지 않은 유럽에서, 왕과 귀족 가문들은 급작스러운 사고나 전쟁 같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 맥빠지는 이유로 대가 끊겨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흔히 서양 역사에 나오는 예를 들어 프랑스 왕이 스페인의 왕을 겸한다는 식으로 어느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 자리를 겸해서 전쟁이나 합병같은 것도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그 왕의 시대에만 특정 나라의 영토가 엄청 커졌다든가 하는 일이 발생한 것도 이런 데에 원인이 있었다. 특히 서양 군주는 그 자신의 옥체 보존이 무엇보다 최우선인 동양 군주와 다르게 스스로가 지배하는만큼 전쟁같은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싸워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직계 대가 끊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후궁과 황후(왕비)를 아우르는 궁중 여관 제도를 통틀어서 내명부라 하는데, 이는 단지 황후와 후궁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여손(女孫)들이나 궁중업무를 보는 궁녀들을 포괄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모든 궁녀들은 군주의 여자들이므로 다 후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궁중업무가 아닌 군주의 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인들만 후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을 기준으로 후궁들도 궁에 살면서 나름 맞은 임무가 있는데 이 중에 후궁입장에선 어떻게 보면 가장 짜증나는 임무는 군주부부의 잠자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왕비의 비서역할이라던지 왕실 제사나 손님 접객같은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엄연한 관료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 후궁제도라고 하면, 내명부 제도 중에서도 왕의 아내/에 관한 것만을 가리킨다(황후나 왕비도 포함).

후궁은 원칙적으로 남편인 군주가 죽은 다음에는 궁내에서 거주할 자격을 잃는다. 소생이 없을 경우 비구니가 되고, 소생이 있을 경우는 그 집으로 나가 사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후궁 자신의 아들이 군주로 즉위한 경우엔 예외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엔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받을 수 있었고 때로는 수렴청정도 할수있지만 한국의 경우, 적서에 엄격한 조선시대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무덤이 능보다 한단계 낮은 원이되고 사당을 궁으로 불렀다.]. 사실 애초에 궁궐에 남아 있어도 모시던 왕이 죽으면 역할이 소멸된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궁궐에 있어도 할 일이 없다. 재정 압박의 문제도 있고, 후궁 개인으로서도 자기 자식의 집에서 부양을 받는 것이 훨씬 편한 인생이다.

한국의 후궁 제도

중국의 후궁 제도

일본의 후궁 제도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

고대 일본에서는 중국의 율령제를 따라 황후 - 비 - 부인 - 빈 순이었고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 시대에는 궁인(宮人)과 채녀(采女) 또한 사용했다. 궁인과 채녀를 후궁 명칭으로 사용했던 시기는 후한으로 후한의 등급은 귀인-미인-궁인-채녀 순이기 때문에 궁인이 채녀보다 높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채녀는 당나라 초기에 81어처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헤이안 시대

나라 시대 말미 코닌 덴노 시절에 처음으로 고유의 관등으로 여유/노쥬(女嬬)가 나타나고 헤이안 시대의 시작을 연 간무 덴노의 시기에는 여어/뇨고(女御)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다. 이후 상시/쇼지(尚侍)라는 명칭이 간무 덴노의 아들 헤이제이 덴노 때 처음 사용되며 갱의(更衣)가 준나 덴노 시절에 처음 사용된다. 여유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만 사용되었다 사장된다. 부인과 빈은 해당 호칭들이 나타나면서 사라졌으며, 비와 궁인의 호칭은 어느 정도 살아남아 궁인이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여어, 갱의로 바뀌면서 사라진다.

다이고 덴노의 갱의(更衣) 중 하나인 후지와라노 쿠와코(藤原 桑子)가 풍어식소/카에데미야스도코로(楓御息所)라고 불리면서 미야스도코로(御息所)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지만 갱의에게 붙이는 특별호칭이었으며 미야스도코로(御息所)는 몇몇 갱의에게 붙여주는 칭호로 사용되었던 호칭이다. 상시가 쇼지가 아니라 나이시노카미라고 처음 불린 건 무라카미 덴노의 죠간덴노 나이시노카미(貞観殿尚侍)였으며 이후에는 상시를 쇼지가 아니라 나이시노카미라고 부르게 된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이후 고산죠 덴노는 전시/덴지(典侍)라는 후궁의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시라카와 덴노는 장시/쇼지(掌侍)라는 후궁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헤이안 시대 말기~가마쿠라 막부 시기에는 전시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가끔 장시와 갱의가 사용되었다. 고후카쿠사 덴노 시기에 여방/뇨바(女房)이 후궁의 명칭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또 초기 이후 사라졌던 비와 궁인의 호칭이 부활했다. 비는 사용 빈도가 낮았지만 궁인은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었다. 여어(女御)는 고후시미 덴노 시기에 사용된 적이 있다 고다이고 덴노 시기에 부활했다. 이 시기에도 꾸준히 전시가 사용되었고 장시도 사용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접어들어 북조에서는 비, 궁인, 여어, 전시가 사용되었으며 주로 궁인과 전시가 사용되었고 남조에서는 초기에는 여어와 전시를 주로 사용하다 후기에는 전시와 궁인이 주로 사용되었다. 고카시와바라 덴노 치세에는 오랫동안 사장되었던 상시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나이시노카미가 아니라 초기 명칭인 쇼지라고 했다.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초기에도 여전히 궁인과 전시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중기 이후 비, 여어, 장시가 부활해 후기에는 여어(女御)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고카쿠 덴노가 전시와 장시만 사용되기도 했으며 닌코 덴노는 여어, 장시, 전시를 사용했다.

근현대

메이지 덴노의 처인 쇼켄 황후는 처음에는 여어(女御)였다고 하며, 이외에도 여러 후궁이 있었다. [* 다만 메이지 덴노의 자식들은 5남 10녀의 총 15명이었지만 요절한 자식들이 많았으며 아들은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생 3남 요시히토(훗날의 다이쇼 덴노)하나만 살아남았고 딸들은 전부 소노 사치코의 4명만 살아남아서 결국 다이쇼 덴노는 불임이었던 쇼켄황후의 양자가된다.]

다이쇼 덴노의 처 데이메이 황후가 아들 넷을 낳게 되면서 후궁 제도는 사라졌으며 쇼와 덴노 시절에는 고준 황후가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아 측실 제도의 부활이 거론되었으나 쇼와 덴노가 이를 거부하고 고준 황후가 간신히 두 을 낳아서 잠잠해져 완전히 사라진다.

주 명칭들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에는 황후의 명칭에 대해 황태부인(皇太夫人)이나 증황태후(曾皇太后)라고 쓰기도 했다.

* 황후/고고(皇后) - 덴노의 정실로 왕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유일한 지위다. 고대에는 군주가 오오키미라 불린 것처럼 오오키사키라고 불렸다. 일본 왕실의 근친혼 법률상 본래는 왕족 출신만이 될 수 있었지만, 세도정치 이후로는 그런 거 없다. 하지만 관례는 남아서 귀족 출신인 경우에는 여어女御로 입궐한 뒤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아들과 상관없이 황후가 되기도 했으나 아들이 태어나야 기반이 생기기에 여어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 중궁/주구(中宮) - 황후의 별칭이기도 하였으나, 기존에 황후가 있음에도 새로이 황후를 맞아들이는 경우 2번째 황후를 '중궁'이라 하기도 하였다. 무라카미 덴노의 후궁 안시가 황후가 되었을 때 별칭으로 사용했고, 이치조 덴노의 황후 후지와라노 테이시와 중궁 쇼시. 예법상으로는 황후와 중궁이 별개인 경우 반드시 황후를 윗전으로 놓아야 했으나, 덴노가 되기 전에 맞아들인 적처가 즉위 후 황후가 되고, 덴노가 되도록 밀어준 권력자의 딸이 즉위 후 새 적처로 들어와 중궁이 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실질적인 권력은 중궁이 더 큰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황후만큼 되기 어려운 자리였다.
* 여어/뇨우고(女御) - 황후/중궁 다음 가는 지위의 후궁. 대신이나 황족 등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딸만이 봉해질 수 있었다. 황후나 중궁은 뇨우고 중에서 뽑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신하의 딸들은 아무리 권세가 크더라도 우선 뇨우고로서 입궁한 뒤 아들을 낳으면 황후/중궁으로 올라갔다. 이는 본래 덴노의 '처' 취급을 받을 수 있었던 후/비의 지위에는 반드시 정4품 이상 품계의 내친왕이 올라야 한다는 율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친왕은 덴노의 딸과 손녀에게만 내리는 직위로, 즉 덴노와 같은 피를 갖는 왕족이 아니라면 본래 후/비 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다. 헤이안 시대 들어서면서 외척이나 상황이 실권을 쥐는 경우가 많아져 이 율령은 유명무실해졌으나 형식만은 남아 있어서, 신하의 딸이 빈에 해당하는 뇨우고를 건너뛰어 처음부터 황후/중궁으로서 입궁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일로 여겨졌다.[*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는 황족 출신이 아니라 고셋케 중 하나인 이치죠 가문 출신인데, 처음에는 뇨우고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황후가 되었다.]
* 갱의/코우이(更衣) - 뇨우고 다음 가는 후궁. 원래는 말 그대로 덴노의 옷을 갈아입히는 시녀였으나, 그 특성상 덴노의 침소에 들어가는 일이 많아 후궁으로 격상되었다. 통상 대내신/다이나곤(內大臣) 이하 계급의 딸들이 봉해졌다.
* 어식소/미야스도코로(御息所) - 갱의/코우이 다음 가는 후궁. 뜻은 '천황의 침실'이라는 듯으로, 원래는 덴노의 침소에서 시중드는 시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승은을 입는 경우가 많아 여어와 갱의 다음의 후궁으로 격상되었다. 황자나 황녀를 낳은 뇨우고나 코우이의 호칭이지만 자식을 낳지 않아도 미야스도코로라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황태자비나 친왕비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정편의 히로인 로쿠죠노미야스도코로가 동궁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속편에 나오는 타마카즈라의 장녀는 상황의 자녀를 낳은 후궁이라고 하여 미야스도코로라 불렸다.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이치죠 덴노 시절 여관이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두 명칭을 혼용했다는 뜻이 된다.]
* 어갑전/미쿠시게도노(御匣殿) - 코우이 다음 가는 후궁. 원래는 덴노의 옷 등을 담당하는 곳 혹은 거기 소속되어 있는 시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 시녀들이 침소에 들어가는 일이 많아 후궁으로 격상되었다. 미쿠시게도노의 장인 벳토(別当)는 곧 뇨우고가 되는 후궁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 상시/쇼지->나이시노 카미(尙侍) - 원래 나이시노 카미는 나이시노 츠카사(內侍司)의 장으로 후궁과 여관들의 중심격인 인물이다. 덴노의 비서실장 격이었으나 점차 후궁으로 취급되었다. 처음으로 상시가 된 자는 헤이안 시대의 2대 덴노 헤이제이 덴노의 상시로 당시에는 나이시노 카미가 아니라 쇼지라고 불렸다. 본래 5위이었지만 3위로 격상되었는데, 여어가 3~4위였다는 점에서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이시노카미는 황후나 중궁이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외에도 후궁들을 모시는 궁녀나 시녀가 나온다. 당연하지만 신분이 높을수록 시녀가 많았다.

* 여방/뇨보女房: 현대에는 아내를 뜻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시녀' 격인 여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후궁이나 궁중의 잡일을 맡는 시녀나 궁녀를 말한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나인 같은 지위. 다만 아무리 시녀라 하더라도 서양의 레이디스 메이드가 귀족이나 신적강하인 왕족의 서자인 것처럼, 신분 높은 사람의 바로 측근으로서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하기 때문에 교양 있고 똑똑하며 어느 정도 신분이 있어야 했다. 신변의 일처리, 편지 심부름, 둘을 이어주거나 구혼 상대를 부르기 위해 상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 아이들의 교육과 유모 역이 모두 여방의 담당이었다. 즉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들을 수행한 것이다. 여방의 구체적인 지위로는 명부/묘부(命婦), 여장인/온나쿠로도(女藏人), 여관/뇨칸(女官) 등이 있으며 서열이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막부의 경우, 에도 막부 이전에는 쇼군의 첩에 대해선 별다른 호칭이나 거주 구역 등이 정해지지 않았다. 에도 막부 시기에는 오오쿠라는 집단 거주시설을 지정하였으며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와 구분하였다. 오오쿠가 정비된 뒤로는 쇼군의 후궁도 엄격한 상하 위계질서에 근거한 계급제가 시행되었으며, 쇼군의 측실은 처음부터 측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 미다이도코로의 시녀이자 사실상 쇼군 측실 예비군(?)인 오츄로(御中臈)로서 우선 오오쿠에 들어온 뒤, 쇼군의 눈에 띄면 오오쿠 관리직인 오토시요리(御年寄)의 주재로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 특별히 밖에서 쇼군에게 지목받은 바 없이 이 등급으로 오오쿠에 들어오려면 어느 정도 집안이 받쳐주거나 엄청난 미인이어야 했다.

쇼군과 잠자리를 가진 시녀를 오테츠키(お手つき), 쇼군의 딸을 낳은 시녀를 오하라사마(お腹様), 쇼군의 아들을 낳은 시녀를 오헤야사마(お部屋様)로 불렀다. 보면 알겠지만 쇼군의 자식을 낳아야 '사마様(님)'라는 경칭이 붙는 걸 볼 수 있다. 이 단계가 되어야 측실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 전까지는 그냥 오오쿠에서 쇼군과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의 시중을 드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베트남의 후궁 제도

가장 최근의 왕조인 응우옌(阮)조에서는 황제의 정처가 살아 있을 때는 단순히 귀비에 봉하였다가, 사망한 뒤에 황후로 추봉하였다.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아내인 남프엉 황후는 제외)

* 황귀비(皇貴妃, Hoàng Quý Phi)
* 1계 비(一階妃, Nhất giai Phi)
* 2계 비(二階妃, Nhị giai Phi)
* 3계 빈(三階嬪, Tam giai Tân)
* 4계 빈(四階嬪, Tứ giai Tân)
* 5계 첩여(五階婕妤, Ngũ giai Tiếp Dư)
* 6계 첩여(六階婕妤, Lục giai Tiếp Dư)
* 7계 귀인(七階貴人, Thất giai Quý Nhân)
* 8계 미인(八階美人, Bát giai Mỹ Nhân)
* 9계 재인(九階才人, Cửu giai Tài Nhân)

정부와의 비교

동서를 막론하고 왕비는 외모보다는 가문을 보고 뽑았고, 정략결혼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는 왕비보다 후궁이나 정부를 더 총애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후궁은 군주의 부인으로서 공식적인 지위가 있었지만 정부는 아니었고, 후궁은 품계를 받기 전에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한 적이 있는 경우는 있어도 품계를 받을 시점에서 군주와의 관계가 불륜인 경우는 없었는데, 정부는 유부녀라서 왕과의 관계가 불륜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후궁은 왕이 죽은 후 자식이 왕이 되지 않은 한 출궁하여 소생에게 부양받거나 비구니가 되었지만 정부는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후궁들

한국의 후궁

* 관나부인(고구려)
* 무비(고려)
* 반야(고려)
* 조선/역대 후궁

중국의 후궁

* 동귀비(후한)
* 보연사(오나라)
* 설영운(위나라)
* 숙비 소씨(당나라)
* 양귀비(당나라)
* 여비(명나라)
* 우미인(초나라)
* 원부인(오나라)
* 이소의(촉한)
* 풍씨(중나라)

일본의 측실

* 일본/역대 후궁
* 오만노카타

유럽의 정부

* 뒤바리 부인(프랑스)
*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프랑스)
* 마담 드 퐁파두르(프랑스)
* 메리 불린(영국)
* 몽테스팡 후작부인(프랑스)

오스만 제국의 후궁

* 나크시딜 술탄
* 쾨셈 술탄

후궁인 가상 인물

* 델피니아 전기 - 폴라 달시니
*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 엘레오놀라 빌타리아, 류드밀라 루리에, 소피야 오베르타스, 엘리자베타 포미나, 올가 탐, 리무아리샤, 티타[*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티글블무드 보른의 연인, 즉 후궁으로 분류한다. 정실은 레긴이다.]
* 무미랑전기 - 무미랑, 귀비 위씨, 숙비 양씨, 덕비 은씨, 현비 서씨, 첩여 소씨, 첩여 정씨, 미인 진씨, 재인 풍씨
* 바람의 나라 - 영채
* 보보경심 - 덕비, 연비, 양비
* 아도니스(소설) - 루리아 로안느, 레제 로안느
* 은하영웅전설 -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주산나 폰 베네뮌데
* 작약만가: 불환곡 - 롱희빈 망모씨(망모탄영)[* 서리꽃에서 롱희를 측비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후에 황후 다음으로 높은 품계를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덕빈 궉씨(궉협란)[* 과거에 귀비였다가 황후의 모략으로 현재 정2품인 빈으로 강등되었고 봉오제 사건 이후 정5품 소용인으로 강등되었다.], 성빈 교응씨(교응 가능사락)[* 봉오제 사건 이후 정3품 희희로 강등되었다.], 혜화비[*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 경숙비[* 회상에서 이름만 언급되었고 봉오제 사건 이후 황제의 후궁들 중 비와 빈 품계를 받은 이가 롱희 밖에 없어 새 비빈을 들였다는것을 보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비 강씨, 온빈 방씨, 순빈, 침빈, 혜공경비[* 현 황제와 오륜공주의 모친으로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다.]
* 작약만가: 서리꽃 - 리빈 장씨(장리)[* 작품 최후반엔 황후로 즉위하고 작약만가 본편에선 태후가 된다.], 삼미랑(미옥)[* 출신이 비천하여 성이 없고, 품계 또한 없다. 작중 황제의 후궁들 중 품계가 있는 이는 리빈 하나뿐인데 이 경우는 황제가 불순한 목적으로 품계를 준 것이다. 다른 후궁들은 황제가 관심을 두지 않아 품계가 없으며, 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삼미랑은 출신이 천한데다 내명부를 관장하는 태후와 사이가 나빠 품계를 받지 못했다.], 송 미인
* 조선공주실록 - 이도희[* 원래는 윤임과 정혼했으나 그와 파혼하고 아버지에 의해 연산군의 후궁 숙원이 되었다.]
* 채운국 이야기 - 십삼희, 은방울 꽃
* 프린세스(만화) - 라라 모니카, 시에타 란, 라리사 카타로스
* 황제의 딸 - 영비, 향비
* 후궁견환전[* 당나라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나라가 배경인 원작 소설에서는 대략 60여명의 후궁이,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25명의 후궁이 등장한다.] - 희귀비 견환(원작 한정으로 사후 황후로 추존.), 혜비 심미장(원작 한정으로 사후 황후로 추존.), 리비 안릉용, 돈숙황귀비 연세란(모용 세란), 단황귀비 제월빈, 경귀비 풍약소, 제비 이정언(탕정언), 여빈 비운연, 양빈 조금묵, 흔빈 여영봉, 녕빈 섭란의, 기귀인 과이가 문원(관문원), 영귀인 채빈(강심수), 귀인 부찰 의흔(두패균), 귀인 순아(방순의), 상재 하동춘(하월청), 지답응 교송지, 답응 여앵아, 귀인 방씨, 정빈 박이제길특씨, 상재 강씨, 답응 손씨, 답응 조씨, 서비 이광(완언연)[* 과군왕의 생모.], 덕비 오아 성벽(임비 주성벽), 한귀비 주의수[* 원작에서는 후궁 출신 황후로 나오지만, 가장 유명한 미디어믹스인 드라마에서는 후궁이였던 적이 없으며 작품 시작 시점 혹은 그 직전에 황후로 즉위한다.], 호온용[*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덕비 감씨[* 현비 묘씨와 함께 총애를 독차지하는 순원황후를 질투했다.], 현비 묘씨[* 순원황후에게 2시진(4시간) 동안 꿇어앉는 벌을 받고 유산한 후궁.], 사이운[*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원작에서의 행보가 드라마 초반부의 흔상재의 행적과 유사하다. 원작 후반부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견환에 의해 벌을 받아 냉궁에 갇힌다.], 서연의[* 드라마에 나오는 단비 제월빈의 원형 중 하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후궁들 중 가장 선량한 인물이자 모든 미디어믹스를 통틀어서 4~6명 밖에 없는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 중 한명이다.], 부여음[*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황제에게 견환의 대역으로서 사랑받았던 후궁들 중 한명이다. 견환의 대역들 중에서는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영적작(모용 세작)[*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모용 세란여동생.], 조선혜[*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대역인 위균과 견환의 나이를 비교하면서 견환이 늙었다며 조롱했다.], 유령한[*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입궁 동기이자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주패[*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같은 궁을 쓰던 기귀인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청해서 견환의 편이 되어 도움을 주었다.], 두패균[* 드라마에 나오는 부찰귀인의 원형 중 하나.]
* 후궁뎐; 꽃들의 전쟁 - 경빈 김씨(김사월), 효빈 장씨(장점순), 타나미실리
* 후궁여의전[* 중국 드라마 후궁견환전의 후속작.] - 한황귀비 오라나랍 여의(작품 중반에 황후가 됨.), 영의황귀비 위연완(사후 황후로 추존.), 혜현황귀비 고희월, 숙가황귀비 김옥연, 순혜황귀비 소록균, 경공황귀비 육목평, 철민황귀비 부찰 제영, 유귀비 가리엽특 해란, 완귀비 진완인, 영귀비 파림 미약, 흔귀비 대미약, 서비 엽혁나랍 의환, 진비 부찰씨, 예비 박이제길특 액음주, 용비 한향견, 돈비 왕부지, 매빈 백예희, 신빈 색탁륜 아약, 이빈 황기운, 순빈 곽석특 람희, 희귀비 뉴호록씨[* 숭경황태후 뉴호록씨.], 길빈[* 길태빈.]

관련 문서

* 일부다처제
* 적서제도

분류:후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