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From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필독 사항 유닠스 계열 저작물, 성인물, 도박 웹 써버 보안 프로그래밍 그래핔 파싱
필독 사항 고스트BSD 표면 웹 싸이트 제작 리눅스 마스터 파이썬 트킨터 뷰티펄 숲
수학 아이투피 마약, 아청물, 해킹 웹 싸이트 보안 웹 프로그래밍 데이터 분석 게임 제작
통계학 뮤와이어 다크넽 싸이트 제작 정보 보안 기사 쟁고우 팬더즈 파이게임

개요

급식충학식충이 되는 것.

진화, 진화론, 진화생물학, 진화 생물학, 진화학


  • [바이오토픽] 지구상의 생명 탄생에 시동 건 레시피 발견

2018-10-29

태초에 RNA가 있었다. 그런데 그 빌딩블록(A, G, C, U)을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는 과연 뭐였을까?

지구상에서 생명을 탄생시킨 분자 무도회(molecular dance)에서, 스타 플레이어는 RNA였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1). 그러나 (DNA처럼) 유전정보를 저장하고 (단백질처럼) 화학반응을 촉진할 수 있는 RNA의 기원은 지금껏 미스터리였다. 이제 한 연구팀이 사상 최초로 한 세트의 단순한 시재료(starting material)를 발견했다. 그것은 초기지구에 존재했으며, RNA의 화학적 빌딩블록 네 가지를 모두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카렐이 그 해답을 내놓은 것 같다. 지난 10월 15일(火) 애틀랜타에서 열린 「생명의 기원에 관한 워크샵」 에서(참고 4), 그와 동료들은 "네 개의 RNA 염기를 모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반응 세트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카렐에 따르면, 생명탄생의 스토리는 겨우 여섯 가지 분자에서 시작되었을 거라고 한다 - 산소, 질소, 메탄, 암모니아, 물, 시안화수소(HCN). 이 여섯 가지 분자는 모두 초기지구에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다른 연구팀은 선행연구에서, 이 분자들이 반응하여 카렐의 것보다 좀 더 복잡한 화합물을 형성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피리미딘(pyrimidine)이라는 염기를 만들기 위해, 카렐은 시아노아세틸렌(cyanoacetylene)과 히드록실아민(hydroxylamine)에서부터 시작했다. 먼저 이 두 가지 물질이 반응하여 아미노이속사졸(amino-isoxazole)을 형성한다. 둘째로, 아미노이속사졸은 또 하나의 간단한 분자 - 요소(urea)와 반응하여 화합물을 형성하는데, 이 화합물들은 리보오스(ribose)라는 당(糖)과 반응하여 최종적인 중간체 세트 중 하나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치올(thiol)이라는 황 화합물과 미량의 철(또는 니켈) 염의 존재 하에서, 이러한 중간체들이 시토신과 우라실이라는 피리미딘 염기로 전환된다. 그리고 보너스가 하나 있는데, 마지막 반응은 염을 구성하는 금속들이 추가적인 양전하를 갖고 있을 때 촉발된다. 이는 퓨린(아데닌과 구아딘)을 생성하는 연쇄반응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금상첨화인 것은, 네 개의 뉴클레오타이드를 모두 생성하는 단계가 한솥(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RNA의 빌딩블록 4종세트가 단체로 생겨난 메커니즘이 사상 최초로 매끄럽게 해명되었다"라고 카렐은 말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 이번 연구는 매우 훌륭하다"라고 플로리다 주 앨라추아 소재 응용분자진화재단(Foundation for Applied Molecular Evolution)의 스티븐 베너(화학)는 말했다. "연구팀은 초기지구에 존재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조건 하에서 네 개의 염기들이 생성된 과정을 납득할 만하게 해명했다."

그러나 이번에 제시된 과정이 RNA의 미스터리를 완전히 해명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RNA의 네 가지 빌딩블록이 (유전물질을 형성하는) 기다란 사슬에 연결되어 화학반응을 수행하려면, 그것들을 활성화하는 제2의 화학적 단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초기지구에 존재한 조건 하에서 RNA가 만들어진 과정'은 일단 화학자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id=298973&Page=&Board=news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2) : 종의 분화

  •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2) : 종의 분화

2018. 3. 7.

그리고 진한 색 가지의 두께와 숫자는 종의 유효집단크기Ne(effective population size)를 나타낸다. 유효집단크기는 직접적으로 해당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두 번째 그림을 잘 보면, 인간의 유효집단크기(8,000)가 다른 유인원 종에 비해 무척 적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곧 인류가 최근에서야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에는 거의 멸종에 가까운 고난을 겪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인류의 개체 수는 70억까지 늘었지만, 이와 같은 번성은 유전적 다양성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잠시 동안 일어난 일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오히려 사람과(Hominidae) 유인원은 역사적으로 침팬지와 고릴라가 가장 번성하였고, 우리 과(family)의 대표 주자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침팬지의 한 아종인 중앙 침팬지의 Ne가 3만 마리이고, 고릴라의 한 아종인 서부 저지대 고릴라의 Ne가 2만 마리이다. 한 아종의 다양성이 인간 종 전체의 다양성을 훨씬 웃돌고 있는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 측면에서 침팬지나 고릴라가 사람보다 몇 배가 크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유전적 다양성이라고는 고작 8천 마리 내외의 Ne를 가진 인간조차 다른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과 살육을 지속하고 있는데, 과연 저들이 전혀 다른 종을 포용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때 인류는 멸종 직전까지 갔던 불쌍한 종이며, 침팬지나 고릴라 종들은 수백만 년 동안 번성했던 종이다.

https://busy.org/@sleeprince/7sgdte-2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3) : 이기적인 종

2018. 3. 11.

예를 들어, 전자의 견해에서 자연이 본래 선하다는 가정은 조금만 주변을 관찰해 보아도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사회에 물들지 않은 어린 인간은 종종 성인 이상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나는 어렸을 때 차에 치여 목이 돌아간 비둘기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비둘기를 관찰하며 즐거워하는 한 무리의 어린 아이들을 함께 보았다. 그 중 용감했던 아이들 몇몇은 비둘기를 막대로 찔러보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도 했다. 그들은 명백히 다른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을 즐기고 있었다. 인간은 분명 선천적으로 잔인함을 내포하고, 그를 유희로 삼는다. 혹시 누군가는 어린 인간 또한 카인의 후예일 뿐 자연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란스 드 발[4]이 기술한 침팬지의 사례는 어떠한가. 드 발은 실험실의 어린 침팬지들이 빵 부스러기를 던져 울타리 뒤의 닭들을 유인하고, 다가온 닭들을 막대기로 때리거나 날카로운 철사로 찔러내는 행태를 보인다고 말한다. 침팬지들이 실험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로서 다른 생명체를 괴롭히는 것이다. 심지어 침팬지들은 하나가 유인책을 맡고, 다른 하나가 몽둥이로 내리치는 등 역할을 분담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침팬지 역시 선천적으로 잔인함을 내포하고, 그를 유희로 삼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즐기는 종이라거나,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종이라는 견해는 부족한 관찰과 종 예외주의에서 비롯된다.

난징 대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꼬챙이에 꿰며 즐거워했던 일본인들은 평범한 일본인이었으며, 유대인을 학살했던 독일인들도 평범한 독일인이었다. 2004년 미국을 발칵 뒤집었던 이라크 포로 학대 역시 평범한 미국인에 의해 자행되었다. 미군들은 이라크 포로를 발가벗긴 채 목줄을 채워 개처럼 끌고 다니기도 했고, 여성 포로를 남편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기도 했다. 그들이 죄의식 하나 없이 찍은 기념사진 속에는 그들의 즐거운 한 때가 담겨 있었다.

"인간의 모든 본성 중에서도 동물의 선조에게서 가장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것은 제노사이드의 본성이다. 제노사이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특수한 인간이 저지르는 일쯤으로 여기며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면 제노사이드의 위험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제3의 침팬지』

하지만 1970년대 구달이 목격한, 카사켈라 집단이 카하마 집단에 가한 공격은 조금 성격이 달랐다. 두 집단은 원래 애정 어린 관계를 나누던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카하마 집단은 카사켈라 집단으로부터 독립하여 남쪽으로 이주한 무리였다. 관찰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카사켈라의 한 공격자와 카하마의 한 피해자는 한때 서로 털을 골라주던 친구 사이였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카사켈라 집단의 첫 공격은 1974년 1월로 기록되어 있다. 카사켈라의 공격 집단은 어른 수컷 여섯 마리와 젊은 수컷 한 마리, 그리고 뒤에 새끼를 남긴 암컷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남하하여 ‘고디’라는 카하마 수컷 한 마리를 덮쳤다. 카사켈라 수컷 한 마리가 고디의 머리 위에 올라타 움직이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사이, 다른 무리가 약 10분에 걸쳐 고디를 세게 때리고 물어뜯었다. 고디는 결국 그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다 고디의 뒤를 이어 카하마 집단의 '데'가 희생당했고, 곧이어 한때 카사켈라 우두머리 수컷이었던 '골리앗'까지 살해당했다. 카사켈라 집단은 카하마 집단에 대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공격을 지속한 끝에 카하마 집단을 3년 10개월 만에 소멸시켰다.

이 사건에서 카사켈라 침팬지는 한 무리의 침팬지 무리를 완전히 해체시켰을 뿐 아니라, 얼마 전까지 친구였던 동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잔인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침팬지는 기억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결코 과거의 친구를 못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집단이 되어 적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침팬지의 공격성은, 종교, 인종, 이념 등의 문제로 어제까지의 이웃에게 총칼을 겨누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인 구달은 카사켈라 집단의 집단 살육을 기록하며, “카사켈라 수컷들이 화기를 갖추고 사용법을 배웠더라면 카하마 침팬지들을 죽이기 위해 화기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으며, 제레드 다이아몬드 역시 “침팬지가 만일 창이라든가 그 밖의 전쟁을 위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인간과 같은 효율적인 살육을 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고 말하였다.

침팬지가 가진 동종 살해의 공격성은 위와 같은 단편적인 예시 뿐 아니라, 통계[11]에서도 잘 드러난다. 통계에 따르면, 곰베에 사는 침팬지의 사망 원인에서, 동종 살해가 질병 다음으로 2순위를 기록했다. 수컷 침팬지의 24~39%가, 암컷 침팬지의 15~21%가 동종 살해로 목숨을 잃었다. 그 다음 순위를 잇는 자연 부상에 따른 죽음이 6~8%를 차지함과 비교할 때, 동종 살해는 침팬지의 주된 사망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간의 잔혹한 본성이 자연의 섭리를 벗어났다고 믿는다. 본질적으로 자연을 선(善)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그들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살육이 전부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맹수는 오로지 배가 고플 때만 사냥을 하며, 살육으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많은 실제 사례는 자연의 선함을 부정한다. 고양이의 장난감이 기본적으로 사냥 놀이임을 생각해 볼 때, 맹수가 사냥을 통해 즐거움을 얻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근거가 없다. 무리지어 사는 대부분의 동물이 동종 살해를 저지르고, 작게는 집단 내부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며, 따돌림 문제를 겪는다. 만약 이렇게 관찰된 자연의 사실마저 선(善)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해 버리고 만다. 애초에 문제는 인간이 만든 선악(善惡)의 잣대를 자연에 들이대고, 인간을 자연에서 배제시키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 있다. 우리는 실존하는 자연을 마주할수록, 우리의 본성이 자연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잔인함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뛰어난 지적 능력이 만든 살상 도구 탓에 파괴력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실제의 동물 사회는 어떠한가. 과연 우리 인간만이 복잡한 사회적 욕구를 갖는 정치적 동물인가. 또 우리만이 폭력을 억제하고 고도의 정치적 목적 아래 사용할 수 있는 종인가. 이에 대하여 프란스 드 발[4]이 관찰한 침팬지 ‘예로엔’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이야기에는 네덜란드의 아른헴 동물원을 배경으로 세 마리의 수컷 침팬지가 등장한다. 늙고 힘없는 침팬지 ‘예로엔’과 젊은 신출내기 ‘니키’, 크고 강한 ‘로이트’가 그들이다. 그리고 드 발의 이야기는 마치 마피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른헴의 젊은 우두머리 로이트가 피범벅이 된 채 철창에 머리를 기대어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드 발이 발견한 로이트는 이미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다. 몸은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는 상태였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뜯겨져 나가있었다. 수컷으로서 중요한 부분 또한 보이지 않았다. 수의사가 도착하고 로이트를 살리기 위한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로이트는 마취에서 깨지 못했다.

로이트의 비극은 예로엔이 아른헴 동물원의 우두머리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로엔은 원래 로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른헴 동물원의 우두머리 침팬지였다. 젊고 강한 로이트를 당해낼 재간이 없던 예로엔은 로이트에게 권좌를 내주었고, 로이트는 예로엔을 실각시킨 후 빠르게 침팬지 무리를 장악했다.

처음 실각을 경험한 예로엔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예로엔은 주변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 무관심했고, 몇 주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한때 위풍당당했던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사라졌다. 하지만, 교활한 예로엔은 이내 복수를 다짐한듯 정신을 차리고 로이트에게 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예로엔은 로이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본인 대신 어리고 겁 없는 ‘니키’를 내세웠다. 니키나 예로엔의 힘은 누구도 로이트와 견줄 수 없었지만, 싸움은 2 대 1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니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었다. 약자 둘이 동맹을 맺음으로써 권력을 쟁취한 것이다. 이후 예로엔은 킹메이커로서 특권을 누리며 니키와 권력의 일부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매력적인 암컷과의 섹스였다. 니키는 보통의 경우 다른 침팬지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예로엔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동맹에 따른 거래였다.

그러나 영원한 동맹은 존재하지 않았다. 4년의 통치 기간 동안 니키는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이 권력을 얻도록 도와준 침팬지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것일까. 니키는 예로엔의 성생활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몇 달 동안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투쟁 끝에, 어느 날 예로엔은 니키와 결별을 고한다. 그리고 그날 밤 로이트는 이 권력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금 권좌에 오른 로이트는 우두머리로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로이트는 암컷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으며, 뛰어난 분쟁 조정자이자, 약한 자의 보호자였고, 분할 통치를 통해 경쟁자 간의 연대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데 뛰어났다.

사실 침팬지 사회에서 우두머리로서 다른 침팬지의 지지와 분쟁 조정자로서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침팬지 무리는 서열이 높은 침팬지에게 약자를 지원하거나 공정한 간섭을 통해 싸움을 말리는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야생 침팬지의 사례 보고에 따르면, 침팬지 무리는 그러한 역할을 무시하고 난폭하게 구는 우두머리를 죽이거나 세력권의 경계로 유배 보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로이트는 우두머리가 된 지 몇 주일 만에 이 중재자 역할을 떠맡았다. 그는 탁월한 중재자였으며 공정한 공권력이었다. 로이트는 집단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았다. 그와 털고르기를 한 시간과 중재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신에 로이트는 계속 싸우려고 하는 침팬지는 누구든 두들겨 팼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이트는 우두머리로서 공적인 역할과 사적인 감정을 구분할 줄 알았다. 반면에, 이전 통치자였던 니키는 썩 훌륭한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니키는 싸움을 누가 먼저 시작했든 자기 친구의 편을 들었는데, 그 결과 어떤 침팬지도 니키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니키는 분쟁 당사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곤 했다. 그래서 니키의 집권 기간에는 예로엔이 모든 분쟁의 중재를 도맡았다. 무리 구성원들이 예로엔의 중재를 받아드렸다. 이는 마치 공식적인 직함과 권력이 다르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아른헴의 침팬지들은 니키보다 예로엔에게 더많은 존경의 예를 표시하곤 했다. 니키는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예로엔은 ‘막후의 권력’처럼 보였다.

한편 로이트가 암컷들의 지지 속에 무리를 통치하던 어느 날, 그는 결국 동맹을 회복한 니키와 예로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예로엔이 로이트를 붙잡은 사이 니키가 급소를 노린 치명적 공격을 퍼부었다. 이 극단적인 보복은 마치 예로엔이 로이트에 의해 두 번이나 맛본 좌절과 분노를 표출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날 밤은 로이트를 도와줄 암컷 무리가 없었다. 암컷들이 별도의 우리로 분리되있었던 탓이다. 니키와 예로엔은 로이트를 도와줄 세력이 없는 틈을 타 정치적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로이트가 살해된 다음날, 니키는 포이스트라는 암컷에게 거친 항의를 받으며 쫓겨 다녀야 했다. 그녀는 로이트의 주요 동맹 중 하나였다.

로이트가 죽은 후, 니키는 다시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그의 집권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배은망덕한 니키가 예로엔을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니키는 아마 로이트가 없는 지금 예로엔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로엔은 ‘댄디’라는 새로운 우두머리 후보를 추대했고,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한 니키는 결국 해자의 물에 빠져 죽었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탐하던 세 침팬지 중 살아남은 것은 나이 든 예로엔이었다.

여기까지 드 발이 들려준 예로엔과 니키, 로이트의 정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롭다. 우리는 그들이 마치 사람인양 그들의 행위에 공감할 수 있었으며, 다시 우리는 이 공감에서 그들이 얼마나 우리 인간과 닮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관찰된 실제의 침팬지는 우리에게 상상 속의 자연이 아닌 진짜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 발의 이야기 속에서, 침팬지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강한 권력욕을 느끼고, 권력을 위해 동맹을 맺으며, 권력을 잃었을 때에는 심한 우울을 앓는다. 또 공정함이 무엇인지를 느끼며, 공정한 지도자에게는 중재자로서 일정한 폭력을 위임할 줄 안다. 반대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에게 저항하고, 선을 넘은 경우 그를 끌어내릴 줄도 안다. 이 모든 특징들은 앞에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징이라고 주장되었던 것들이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하던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사람’으로 바꿔 보여준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까.

https://busy.org/@sleeprince/3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4-1) : 이타적인 종 ; 정의란 무엇인가

2018. 3. 18.

하지만, 실지로 자연에서 살아가는 유인원들이 어떻게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지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분배 정의가 ‘자연적’임을 항변할 수 없다. 유인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힘 있는 우두머리가 먹이를 독차지하고 우두머리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서열에 따라 먹이를 나눠 먹는, ‘약육강식’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는 제법 그럴듯하게 먹이를 분배한다. 먼저, 침팬지 사회에서 먹이를 분배하는 주체는 먹이의 소유자이다. 언뜻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은, 으레 우두머리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리라는 뭇사람들의 추측과 비교해 볼 때, 꽤 주목할 만한 일이다. 먹이의 소유권은 먼저 점유한 침팬지가 취득한다. 여러 침팬지가 먹이를 동시에 발견한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소유자가 결정되지만, 일단 먹이를 점유한 침팬지는 서열과 관계없이 먹이의 소유자가 된다. 힘으로 먹이를 빼앗는 침팬지는 없으며, 우두머리 수컷조차 조용히 먹이를 분배해주길 간청하며 손을 내민다. 이러한 행동을 학자들은 ‘소유권 존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리의 구성원 대부분이 먹이를 분배 받는 객체가 된다. 소유자는 먹이를 독식하지 않고 나름의 기준으로 먹이를 나눈다. 보통은 먹이 소유자와의 친분 순으로 분배되며, 사냥을 통해 먹이를 얻은 경우에는 사냥에 참여한 동료를 우선하여 분배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데, 털 고르기 같은 정서적 교감, 이전에 받았던 먹이에 대한 보답, 정치적 동맹 관계, 함께 사냥한 동료의 몫 등 여러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별 관계가 없더라도 먹이를 간청하는 상대를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사냥한 원숭이 고기를 침팬지들이 약 두 시간에 걸쳐 분배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증언한다.[4]

요약하자면, 침팬지들의 먹이 분배 기준은 호혜적 관계에 있다. 침팬지들은 서로 먹이를 빼앗지 않는다. 상호 적대 관계를 형성할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털을 골라주었던 친구, 자신에게 좋은 먹이를 주었던 상대, 혹은 과업을 함께 완수한 동료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또 누군가에게는 먹이를 베풀어 마음의 빚을 지우는 방식으로 먹이를 분배한다. 일견 호혜적 관계는 이해타산적 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장부의 빚은 갚음으로써 관계를 종료시키지만, 마음의 빚은 갚음으로써 관계를 남기고, 다시 마음의 빚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장부의 빚은 먹이에는 먹이로, 노동력에는 노동력으로 갚지만, 마음의 빚은 친절과 은혜, 협동, 먹이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갚는다.

물론 침팬지들도 마냥 침팬지 좋은 자선 사업가는 아니다. 그들도 받을 빚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으며, 기대의 배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만약 A 침팬지가 B 침팬지에게 먹이를 크게 베풀었는데, B 침팬지는 A 침팬지에게 적절한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A 는 실망하고 B 에게는 다시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침팬지 사회에서 정 많고 관대한 침팬지가 인색한 침팬지보다 더 좋은 대유인(對類人)관계를 맺고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침팬지 사회의 분배를 더욱 섬세한 작업으로 만든다. 더구나 침팬지들은 다른 침팬지들의 것과 자신의 보상을 비교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다양한 호혜적 관계 속에서 누군가 서운해 하지 않을 공정한 분배가 필요한 것이다. 두 시간이나 걸린 원숭이 고기의 분배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https://busy.org/@sleeprince/4-1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4-2) : 이타적인 종 ; 도덕적 동물

2018. 3. 24.

‘공감(共感)’은 글자 그대로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갓 태어난 아기에서부터 공감 능력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마치 한 현의 진동이 다른 현의 진동을 촉발하는 것처럼, 한 아기로부터 시작된 웃음이나 울음이 다른 아기들에게 전염되는 현상은 유명하다. 걸음마를 막 뗀 아기들은 다른 아이가 넘어져 우는 모습을 보고 따라서 울먹이며 부모에게 매달린다. 이 시기까지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가 보여준 감정에 공명하였을 뿐이지만, 조금만 성장하면 곧 자신의 감정과 대리 감정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5]

그리고 만 한살이 조금 넘은 아기들은 ‘공감’에 수반하여 ‘위로(consolation)’라는 행동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아기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상처를 두드리거나 비비면서 상대를 위로하려 든다.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동정심의 표현은 첫 걸음마를 떼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성취 과정인 셈이다.[5]


아기에게서부터 보이는 인간의 이 사랑스러운 반응들은 사실, 대부분의 포유동물에게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미 1959년에 나온 ‘남의 고통에 대한 쥐의 감정적 반응’이라는 도발적 제목의 논문은 쥐에게도 공감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논문에 따르면, 쥐에게 지렛대를 누르는 동작으로 먹이를 얻을 수 있음을 학습시킨 뒤, 다시 그 행동이 곁에 있는 다른 쥐에게 전기 충격을 초래함을 보여주면, 쥐는 그 동작을 멈춘다고 한다. 우리가 혐오하는 쥐조차, 동료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먹이에 대한 욕구를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연구에서 같은 실험에 놓인 원숭이들은 훨씬 강한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어떤 원숭이는 친구가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본 뒤로 5일 동안 손잡이를 당기지 못했고, 어떤 원숭이는 12일 동안이나 먹이를 얻지 못했다. 이 원숭이들은 거의 굶어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친구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 했다. 현대의 뇌 과학은 뇌에서 감정의 전염을 담당하는 부분이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쥐, 개, 코끼리,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도 이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5]

‘위로’의 행동은 ‘공감’ 반응 자체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또한 다양한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아마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자연히 아는 사실일 터인데, 애완동물들은 고통스러워하는 가족에게 앞발을 얹는 동작으로써 걱정하는 기색과 함께 그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사람들도 이들의 노력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위로의 행위는 특히 우리의 친척인 유인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그들의 위로가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더욱 눈에 띈다. 어린 침팬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울부짖을 때, 어른 침팬지는 즉시 달려와 이 어린 침팬지를 들어 올려 흔들며 달래 주는데, 이 행동은 마치 우리가 어린 아기를 흔들며 어르고 달래는 모습과 같다. 유인원들에게 위로는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면서, 또 강하게 나타난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심리학자 나디에 라디기나 코흐츠(Nadie Ladygina-Kohts)가 어린 침팬지 ‘요니’를 기르며 쓴 다음의 기록은, 유인원에게 ‘위로’라는 반응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5]


"내가 눈을 감고 우는 체하면, 요니는 지붕이나 우리 천장처럼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즉각 장난이나 행동을 멈추고 달려왔다. 그 방법 외에는 소용없다. 요니는 마치 나를 공격한 사람을 찾는 듯이 급히 내 주위를 빙빙 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듯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내 턱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싸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얼굴을 만진다."


‘역지사지’는 타인의 입장과 인지를 추론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도덕적 행동에는 ‘공감’ 뿐 아니라 ‘역지사지’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굶주린 사람을 도우려면, 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가 나와는 다르게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고, 상대가 밥을 원한다는 생각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마음 이론(theory of mind)’ 또는 ‘조망 수용(perspective taking)’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경우에도, 조망 수용 능력은 3살 무렵부터 시작하여 청소년기까지 점차 발달해 나가는 높은 수준의 인지 능력이다. 조망 수용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을 다른 사람도 보고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상대방을 볼 수 없으면 상대방도 자신을 볼 수 없다고 여긴다. 아이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함께 하다보면, 얼굴만 커튼 뒤에 숨겨 놓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최근까지 역지사지의 도덕적 행동을 동물들이 갖기에는 너무 어려운 능력으로 여겼다. 실제로 많은 동물들이 역지사지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심지어 대부분은 ‘자신’조차 구분하지 못해 거울을 보고도 자신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교적이며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로 알려진 코끼리, 고래, 유인원 등에게서, 그들이 이러한 능력을 가졌음을 추정케 하는 행동들이 관찰되며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험실의 연구자들은, 1978년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맥과 우드러프의 기념비적인 논문 “침팬지는 마음 이론을 갖는가?” 이래로, 침팬지들과 유아들을 비교하며 침팬지의 역지사지 능력을 실험해 왔다. 그 결과로, 40여 개의 연구를 정리한 조셉 콜과 마이클 토마셀로는 그들의 리뷰 논문 “침팬지는 마음 이론을 갖는가? 그 30년 후”의 결론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3]


"이제 인간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 친척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읽고 반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분명히 침팬지들의 사회적 이해는,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다른 이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시작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침팬지가 틀린 믿음(false belief)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명백하게 그들은 다른 이들의 표면적 행동만을 단순히 인지하거나, 아무 생각 없는 행동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검토된 모든 증거는 침팬지가 다른 이들의 인지(perception)와 인식(knowledge)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목적과 의도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들은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어떻게 함께 작용하여 의도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는지를 이해한다. (후략)"


그리고 실험실 밖의 연구자인 프란스 드 발[5]은, 위와 같은 긍정적인 실험의 결과에도,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짜인 실험 설계가 유인원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고 믿는다. 그는 제한된 실험보다 실제의 유인원 무리에서 관찰되는 수많은 행동들에서 그들의 역지사지 능력을 추론한다. 특히 ‘표적 원조(targeted helping)’는 유인원들의 역지사지 능력을 평가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표적 원조’란 다른 이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하는 행동을 이르기 때문이다. 드 발에 따르면, 표적 원조는 대부분의 동물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행태이지만, 유인원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 그가 관찰한 다음의 표적 원조 사례는 유인원이 가진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5]


"영국의 트와이크로스 동물원에 사는 쿠니라는 이름의 보노보는 찌르레기가 야외 사육장의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서 보살펴 주었다. 쿠니는 충격을 받은 찌르레기를 들어 올리더니 두 발로 서게 했다. 그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쿠니는 찌르레기를 살짝 던졌다. 그렇지만 새는 푸드덕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쿠니는 찌르레기를 손에 쥐고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두 다리로 나무 줄기를 꽉 감싸 잡은 쿠니는 양손에 찌르레기의 날개를 하나씩 잡아 조심스럽게 벌린 다음, 마치 작은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듯이 사육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나 찌르레기는 사육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사육장 주변에 파놓은 해자의 둑에 내려앉았다. 나무에서 내려온 쿠니는 한참동안 지켜보면서 호기심 많은 어린 보노보로부터 찌르레기를 보호해 주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찌르레기는 기운을 되찾고 무사히 날아갔다.

쿠니가 찌르레기에게 한 행동은 다른 유인원을 도울 때 보이는 모습하고는 사뭇 달랐다. 틀에 박힌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과는 아주 다른 동물이 처한 그 상황에 알맞은 도움을 제공한 것이다. 야외 사육장 곁을 지나가는 새들을 보고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감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종류의 공감은 다른 동물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찍이 동물에게서는 보고된 적이 없는 사례였다."

https://busy.org/@sleeprince/4-2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1)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선과 악의 공존

2018. 3. 30.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을 이야기 하자면, 인간의 이기성과 이타성은 ‘편 가르기’로 구분되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내 편에 들어온 존재에게는 사랑을, 네 편에 들어간 존재에게는 증오를 품는다.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존경하는 지도자 키루스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에서 강조한 것도, 키루스가 친구의 선행에 대해 항상 얼마나 관대하게 보답하고, 적의 행위에 대해서는 얼마나 엄중히 복수했는가(귀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는 것)이었다.[6] 사람들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마음의 경계선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편 가르기’의 이중성은 제인 구달이 관찰한 침팬지의 행태와도 일치한다. 침팬지들은 가족 구성원들끼리 애정 어린 결속을 유지하고, 가까운 친족끼리 서로 돕고 지지하며, 또한 무리의 성숙한 수컷은 사냥을 하고 영역 경계를 순찰하면서 암컷과 새끼들을 보호한다. 더욱이, 구달은 수십 년간 그들을 관찰한 결과, 침팬지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세련되어지고 문화적 전통이 발전함을 발견했다. 하지만 침팬지들은 반면에 이웃 집단에게는 극도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다른 무리의 침팬지를 단순히 쫓아내는 수준이 아니라 목숨이 끊어질 만큼의 공격을 퍼붓는다. 그뿐 아니라 이웃 집단의 중심부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한다.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가 같은 집단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마치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더는 동족이 아닌 양, 구달의 심술궂은 표현을 빌리자면 “탈침팬지화”라도 되는 듯이 폭력성과 잔혹성을 드러낸다.[8]

다시 시선을 사람에게로 돌려 보자면, 제인 구달의 “탈침팬지화”라는 표현은 인간에게도 너무나 훌륭하게 적용된다. 이미 “인간성 말살”, “인간 이하 취급”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유럽과 북미 여러 나라에서 연구된 바 있는데, 이 현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집단보다 위상이 낮은 집단의 인간성을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집단은 인간의 특수한 감정, 이를 테면 수치심이나 행복감 같은 이차적 감정이나 미묘하고 숭고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그저 두려움이나 쾌락 같은 원초적 감정만을 좇는다고 여기는 식이다. 특히 집단정체성이 강할수록 다른 집단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은 두드러진다.[1] 그리고 이 같은 “탈인간화”는 “탈침팬지화”와 마찬가지로 잔혹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흔하게 사용되어 왔다. 나치는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한낱 ‘이’와 같은 기생충으로 다루었고, 알제리의 프랑스인 이주자들은 현지 이슬람교도를 ‘쥐’라고 불렀다. ‘문명화된’ 파라과이인은 수렵 채집민인 아체족을 ‘미친 쥐’로, 보어인은 아프리카인을 사나운 동물 ‘비비’라고 불렀다.[6] 2004년에 일어났던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에서도, 당시 수용소 치안 책임자였던 재니스 카핀스키는, 제프리 밀러 소장이 이라크에 부임하여 포로들을 ‘개’처럼 다루어야함을 강조했다고 증언했다.[1][5]


혹자는 내가 너무 극단적인 모습을 부각하여 문제를 지나치게 일반화한다고 지적할는지 모른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인간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집단에 속해 있고, 앞선 예시와 같은 강한 감정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집단은 원수진 몬태규가와 캐플릿가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개념이 아니다. 구달이 지적하였듯, 집단이란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범주에 속한다. 그녀는 상대의 살점과 피를 갈라먹은 카사켈라 집단과 카하마 집단이 원래 얼마나 서로 가깝고 친근한 관계였는가를 예시로 든다.[8] 또한 집단은 그 경계가 유동적일 뿐 아니라 그 높이도 유동적으로 나타난다. 예로엔과 니키, 로이트가 형성한 집단 내 집단처럼 이기심과 이타심의 강도는 다른 수준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유동적인 집단의 개념은 인간의 심리학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혀 차이가 없는 두 집단을 임의로 구분하더라도 집단 구성원들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서 대한다는 점은 현장연구와 실험연구 양쪽 모두에서 밝혀진 바이다. 2005년 태풍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백인은 흑인 피해자보다는 같은 백인 피해자의 인터뷰를 보며 정부의 무능을 더욱 강도 높게 비판하고 성금도 많이 냈으며, 통제된 실험의 틀 안에서 공격적 행동을 관찰했을 때 백인은 흑인에게, 영어를 쓰는 캐나다인은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인에게,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에게, 비유대인은 유대인에게 더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1] 그리고 좀 더 교묘한 내용의 한 심리학 실험은, 사람들에게 ‘파란색’과 ‘초록색’ 두 가지 색깔의 배지와 볼펜과 메모장을 무작위로 나누어 주고, 각자의 발표를 평가하라고 시켰을 때, 실험참가자들은 자기와 같은 색깔의 물건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었음을 확인했다.[5] 우리의 일상에서 이기성과 이타성을 가르는 심리적 스위치는 부지불식간에, 고작 소지품의 색깔에서부터, 사는 지역, 소득 수준, 언어, 피부색 등 다양한 수준으로, 또 다양한 기준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편 가르기’는 ‘종 예외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심리 작용이다. 나아가, ‘종 예외주의’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예외주의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은, 상대를 평가절하하고 공감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각종 예외주의가 내달릴 출발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외주의가 단순히 무관심에서 비롯된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폭력성이 뚫고 나올 틈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예외주의는 항상 잔혹한 비극을 위한 마중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https://busy.org/@sleeprince/5-1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2)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이기와 이타의 진화 上

2018. 4. 15.

사람 뿐 아니라 유인원에게서도 보이는 마음의 경계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진화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암시한다. 이타심은 왜 집단 내부로만 향하는지, 그리고 이기심은 왜 집단 외부로 뻗는지를 생각해 보자면, 이기심과 이타심은 각자 다른 경로로 발달한 남남이 아니라, 집단 사이의 경쟁 속에서 함께 자라난 형제라고 할 수 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역시 『제3의 침팬지』에서, 유인원 자체가 포식자인 동시에 사냥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유인원의 공통 생존방식인 집단생활은 다른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7] 유인원 집단은 아마 혈연관계로 맺어진 작은 집단에서 생존의 이득을 경험했을 것이며, 경쟁을 거쳐 점점 더 큰 집단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집단을 향한 적개심이 집단의 생존 확률을 높였을 터이며, 강한 결속력이 집단의 생존 확률을 높였을 터이다. 적개심은 곧 이기심과 폭력성으로, 결속력은 곧 이타심과 도덕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또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동체 의식을 이끌어 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외부 집단과의 적대감이며,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은 도덕성을 출현시키는 단계까지 내집단의 단결을 높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성취인 도덕성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가장 저열한 행동인 전쟁과 진화상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6] 이와 관련해 제인 구달 역시, 전쟁에 따른 대량 학살로 인해 특정 집단이 몰살당하고 다른 집단은 살아남는 과정에서 ‘집단 선택’이라는 일종의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초기 인류의 전쟁은 이타주의, 용기, 지성,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협력 같은 귀중한 인간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른 유인원과 구분되는 커다란 뇌를 탄생시킨 가장 큰 진화의 압력이었다.[9]

https://busy.org/@sleeprince/5-2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5-2) : 이기와 이타의 경계 ; 이기와 이타의 진화 下

2018. 4. 19.

리처드 도킨스는 ‘순진한 집단 선택 이론’을 비판하며 도덕적 이상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지만, 반대로 본인은 마음속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도덕적 가치를 지나치게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인간 또한 진화의 산물임을 볼 때, 제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가 이타적인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타적인 행동을 개체 수준의 생존 전략으로만 설명하기 위해서 너무 단순한 사례들만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과 같이 공감과 역지사지에서 오는 이타적 행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고, 혈연선택을 벗어나는 유인원의 이타성을 ‘오류’로서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4]

또한 도킨스는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서도 눈을 감았다.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었고, 단합하지 못한 집단은 종족 학살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많은 영장류학자들이 유인원의 치열한 집단 경쟁과 동종 살해 성향을 보고했다. 그럼에도 그는 집단 수준의 선택압은 없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타성의 근원을 오로지 집단 내에서의 생존 전략으로 취급함으로써, 실제로 발견되는 사회적 행위들의 설명을 포기한다. 일례로, 침팬지나 보노보는 집단 내의 분쟁이 발생하면 높은 서열의 개체들이 나서서 당사자들을 화해시키는 사회 활동을 한다. 수컷 우두머리는 힘으로라도 싸움을 뜯어 말리고, 암컷 우두머리는 머쓱해진 양측을 털고르기 해주며 화해시킨다.[6] 이 같은 이타적 중재 행위를 어떻게 혈연 선택이나 개체 수준의 선택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개체 수준의 선택에 따르자면, 분쟁에 개입함은 자칫 싸움에 휘말릴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관망함은 분쟁 당사자의 죽음으로부터 자원을 나눠 쓰는 경쟁자가 제거되는 이득이 있으므로, 개체들은 그저 싸움을 관망하거나 부추김이 최선의 전략일 터이다.

인류를 비롯해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은 집단의 분열을 막고 친목을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 집단의 역사에서 분열은 죽음을, 단합은 생존을 의미했다. 피와 살이 튀는 집단 간의 이기적인 경쟁 속에서 이타적인 행동은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시작이 개체 수준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하여도,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고도화시킨 기제는 집단 수준의 선택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도킨스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이기와 이타의 본성을 왜곡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 있을 그에게, 집단을 위한 이타적 희생이 결국은 이기적 생존의 길임을 일깨우는, 집단 선택론자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하면 살 것이다.”

https://busy.org/@sleeprince/2kdf8q-5-2


노화의 진화적 원리

노화 문서 참조.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