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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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스페인콩키스타도르.

Hernán Cortés(1485? ~ 1547.12.2)

후술하겠지만 관점에 따라 인류사에 기록될 '정복자'와 무고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자는 주로 유럽에서,[* 스페인에서는 한때 지폐의 모델로 쓰인 적도 있다.] 후자는 주로 중남미에서 받는 평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에르난 코르테스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코르테스는 페르난도 코르테스, 페르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다양한 이름을 썼고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이름은 페르난도 코르테스인지라 해외엔 페르난도 코르테스로 잘 알려진 경우도 있다.

생애

출생과 성장

1485년 엑스트레마라두라 바다호스 메데인에서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와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르테스의 공식 전기작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코르테스의 부모가 모두 이달고 출신이며 그의 뿌리가 유서깊은 귀족이라고 주장했으나 코르테스에 비판적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시종의 아들이며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아버지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바도 있고 그의 어머니도 도냐(doña) 칭호로 불리었기 때문에 최소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에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할 기회는 없다시피했고 많은 스페인인들이 레콩키스타나 이웃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함으로 부귀영화를 노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르틴 코르테스는 아들을 관리로 승진시키기 위해 코르테스가 14세이던 시절 살라망카로 유학보냈다.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체류 시절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고마라는 그가 프란시스코 데 발레라의 집에서 2년간 문법을 배웠으나 건강 문제로 중단했다고 기술했고 세르반테스 데 살라사르와 안토니오 데 솔리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으나 다만 코르테스가 질병과 적성, 경제적 궁핍으로 그만두었다고 조금 더 다른 이유를 대었다. 그런데 코르테스를 싫어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을 땄으며 라틴어를 배워 구사할 수 있었다는 등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시절을 실패로 묘사한 전기작가들관 다른 주장을 하였다. 베르날 디아스도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부연한 바가 있으나 정작 코르테스는 자신이 법학사 자격이 있다고 말한 바가 없었다. 코르테스가 고작 2년 밖에 안되는 시간에 대학이라도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코르테스의 친척인 후안 수아레스 데 페랄타는 코르테스가 바야돌리드 시에서 법원 서기로 취직해 1년간 머물며 글과 서기의 사무에 배워 능통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던 중 라레스 기사단의 기사인 수사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산토도밍고 섬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자신의 고향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이달고들을 대거 모집하여 데려갔는데 이때 신대륙으로 향한 이달고들로 알론소 포르토카레로, 곤살로 데 산도발, 안드레스 데 타피아 그리고 코르테스가 있었다. 코르테스의 아메리카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메리카로

1504년 코르테스는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산토도밍고에 상륙했다. 오반도 총독은 그를 아수아 시의 서기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그곳에서 6년간 서기로 근무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집, 건축용 부지,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큰 수입을 얻는 등 부유해졌다. 1511년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 제독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쿠바 정복과 통치 임무를 맡겼는데 코르테스는 300명의 쿠바 원정대에 포함되었다. 스티븐 메리맨 등은 코르테스가 쿠바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뒷받침되는 증언이 없는데다가 스페인의 쿠바 정복은 쿠바 원주민들로 부터 별 저항을 받지 않았으므로 별것 아니었기에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얻은 경험으로 아즈텍을 정복했다는 일부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맡은 임무는 행정직으로 페르난디나 섬(현재 쿠바)에 건설된 바라코아 시의 알 칼데로 일했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관리로서의 성공은 물론,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냈고 목장과 금광 경영을 통해 유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1517년 쿠바에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Francisco Hernández de Córdoba)라는 사람이 노예 수급을 위해 탐험 중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는 일이 있었고 그 섬[* 코르테스 때 까지 스페인인들은 유카탄 반도를 섬으로 알았고, 때문에 코르테스는 보고서에서 유카탄 섬으로 보고했다.]의 참포톤(Champotón)이란 마을에 상륙했다 원주민의 야습으로 26명의 사람들이 죽고 상당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탐험대의 수장인 페르난데스도 간신히 살아서 페르난디나 섬(쿠바)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원주민들이 금이 많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당시 신대륙을 담당하던 사람은 인도[* 신대륙을 발견할 때 스페인과 콜럼버스는 여기를 인도로 알았다.] 총독(Virrey de las Indias)의 대행[* 당시 인도총독은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Diego Colón)이었다.] 이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de Cuéllar)였는데 이 보고를 들은 디에고는 유카탄 반도를 탐험하기로 마음을 먹고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를 탐험대장으로 삼아 탐험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후안의 탐험대는 탐험으로 얻은 보물을 1척의 배에 실어 페르난디나 섬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계속 유카탄 인근을 탐험한다. 그리고 도착한 보물을 본 디에고는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크게 실망하고 이번에는 탐험중이라 돌아오지 않는 후안 데 그리할바를 찾는다는 구실로 다시 탐험대를 계획한다.(출처:에르난 코르테스, 코르테스의 맥시코 제국 정복기, 1장 첫번째 보고서, 앙헬 고메스 편집, 김원중 번역)

그리고 이 3차 탐험대를 꾸리는 과정에서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산티아고의 알단테를 맡고있던 코르테스와 접촉하는데 당시 코르테스는 나비오 선박 3척과 상당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때문에 탐험대 자금의 2/3를 코르테스가 지원하여 탐험대를 편성했다고 코르테스는 주장한다. 이후 1518년 10월 코르테스는 디에고에게 원정대장[* 재미있는 사실은 코르테스는 보고서에 자신을 폐하의 원정대장으로 자칭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쓰거나 총독으로 간단히 호칭했는데, 사실 코르테스는 국왕에게 정식으로 임명받지 않았다.]으로 임명되어 원주민들과 물건을 거래할 권한만을 가진 채 유카탄으로 떠났다. 사실 벨라스케스가 코르테스를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코르테스의 충성심이 확고해 보여서 였기 때문인데 이 시기 코르테스는 노골적으로 벨라스케스의 요구를 한참 넘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코르테스의 정적들은 벨라스케스에게 로비를 하여 벨라스케스에게서 코르테스의 대장 임명 취소를 이끌어냈으나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내린 출항 중지를 씹고 1519년 2월 10일 600명의 스페인인, 300명의 안티야스 원주민, 12필의 말, 10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배와 함께 유카탄 탐험에 나섰다.

신대륙을 정복해 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성대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멕시코 정복사의 첫 단원을 시작하며,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서는 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그냥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금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오로지 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 근처를 헤집고 다닌다. 이 와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된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의외겠지만, 이 탐욕스러운 이방인들을 중앙아메리카 근방의 모든 부족들이 적대한 건 아니었다. 특히 아즈텍에 인신공양을 위한 가축취급을 받던 틀락스칼텍과 같은 약소 부족들은 (이유야 어쨌건)증오스러운 아즈텍 부족들을 탈탈 털어버리는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금과 각종 자원[* 개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린체를 역시 이런 식으로 얻었다.]을 제공하며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했고, 코르테스는 이 동맹을 존중할 것을 맹세하며[* 실제로 지키긴 했다.] 동맹 부족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된다.[* 이전에 표류해와서 원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스페인인 선원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인 아즈텍에 대한 이야기가 코르테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백여 명의 뜨내기를 이끄는 안달루시아 촌뜨기는 인구 수백만에 수만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발상을 하고 만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금)을 찾아 열심히 서진을 시작하게 되고, 진군 도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부족들은 전부다 때려부순다. 다만 흔히 오해되는 것과 같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 형상은 모조리 과녁으로 간주하며 피로 물든 행군을 해나간 건 아니며, 가능하면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마주치는 부족마다 족족 몰살한 다음 약탈을 수행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코르테스가 지닌 인적 자원은 너무 적었고, 코르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항하는 부족들에게 코르테스에게 협력하라는 전언을 보내두기도 하였다. 또한 아즈텍 동맹 부족들 중에서도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부족들들도 많았다. 가령 아즈텍의 동맹이었으나 그 지배를 환멸하던 한 부족장인 치코메코아틀은 코르테스를 환대하며 코르테스가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즈를 세우는 걸 도와준다.[* 참고로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 5세에게 쿠바 총독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즈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

w=500&h=320 베라크루즈를 건설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하며,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여 쫒아낸다. 두 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틀란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몬테수마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텍인들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된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있는 것을 경계한 휘하 틀락스칼텍인들은 반대한다. 또한 몬테수마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 이상 확인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 틀락스칼텍인들은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은 틀락스칼텍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에 대한 틀락스칼텍인들의 증오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유럽인의 유리한 점

화약

이들이 고작 중대나 대대 정도에 불과한 규모의 촌놈들 집합체로 저 장대한 대제국과 맞설 생각을 하려고 했던 것에는 그만큼 자기들이 믿을만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다름아닌 화약. 즉, 대포였다. 제아무리 제국이라지만 기껏해야 돌로 만든 창과 나무 몽둥이가 주력무기인 놈들 상대로 총과 대포라는 결전병기라면 숫자에 상관없이 해볼만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금 못지 않게 헤집고 다니면서 찾아 헤맨 광물이 다름아닌 원주민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초석이었는데 이 초석이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이었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산꼭대기에 가야 있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별 시답지 않은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저질 광물 나부랭이가 이렇게 무서운 물건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화약이 엄청나게 무서운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강철판도 마치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듯 마구 뚫어버리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다.[* 사실 당대의 화기는 흉갑에 막히는 경우도 꽤 됐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까지도 철제 흉갑을 입은 기병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상기했듯 제철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에 갑옷이라고 입어봐야 가죽쪼가리가 전부였고, 이런 가죽 갑옷은 화기에 대한 방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파괴력은 맞는게 곧 즉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추가로 무서운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화약을 쏠 때 내는 소리다. 뻥뻥 터지는 게 마치 천둥치는 소리를 연상케 할만큼 크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화약에 맞아도 무섭고 안 맞아도 무섭다. 콩키스타도르의 입장에서는 명중되어도 적을 압도하고 빗나가도 압도한다.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은 아무리 신뢰하는 원주민에게라더라도 절대로 화약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만들 정도로 엄청나게 친한 여자인 말린체에게조차도 다른 소원은 다 들어줘도 오직 초석으로 화약을 만드는 비법만은 일절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유는 당연히 얘들이 이걸로 무장하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콩키스타도르가 비교 자체가 안되는 머릿수로 그나마 아즈텍 제국을 압도하는 몇 안되는 수단이 화약무기인데 아즈텍 제국이 흑요석 몽둥이가 아니라 화약으로 무장하면 이미 GAME OVER. 절대로 가르쳐 줄 리도 없고 가르쳐 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정복과정에서 화약무기는 결국 초기의 충격효과를 상실하게 되는데, 계속 부딪히는 원주민들도 어쨌든 사람인지라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익숙해져서 폭음때문에 사기가 곤두박질 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기도 했고, 습한 기후와 초석을 안정적으로 보급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총기나 대포의 유지 및 보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초석을 캐기위해 유황을 찾아 화산을 올라가는 콩키스타도르들도 있었다. 화약도 화약이지만 철제 포탄도 다 떨어져서 돌을 깎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 대포를 유럽에서는 도태된 사석포처럼 쓴 셈이다.] 당시 총기의 성능을 보면 알겠지만 연사나 속사가 불가능하였고,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전술들이 많았지만, 또 그러기엔 보유한 화기의 수량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원주민 제국들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흔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화약무기의 일제 사격에 모랄빵나며 순식간에 무너지는 원주민 군대 같은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냉병기와 갑옷

어쩌면 오히려 화약보다 더 효과적이었던건 스페인 톨레도강철로 만들어진 각종 냉병기와 갑옷들이었다.[*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 남부 톨레도 지방은 철광산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형성과정에서 긴 전쟁통을 겪은 국가 답게 금속을 사용한 무기제련에 뛰어난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단단한 강철무기로 아즈텍인들의 빈약한 가죽갑옷 정도는 갑옷째로 절단할 수 있었고,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은 흑요석 무기로는 흠집은 커녕 오히려 내리친 흑요석 무기를 박살내버렸다. 이에 수백년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발달한 스페인 군인들의 전투실력이 더해져 원주민 전사들을 무참히 무찌를 수 있었다. 반면에 아즈텍 제국의 전사들은 소위 꽃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사살보단 포로획득을 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치뤄 왔으므로 살상을 위한 기술이 아닌 제압과 포획을 위한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기병

더불어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을 이용한 기병들의 공격은 아즈텍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상대였다.[* 오툼바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숙련된 기병 한명이 튼튼하게 무장한채 달려가 적진을 돌파하고, 지휘관을 살해하여 아즈텍 군을 무너뜨리는 모습이 아즈텍 정복과정에서 수차례 나온다.] 사실상 원주민 군대는 기병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했다.

주변 원주민들의 지지

그 외에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코르테스는 주민 부족사이의 정보를 상당히 수집했고, 아즈텍이 인신공양, 약탈로 인하여[*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은 당시 마야와 아즈텍 전역에 있던 풍습이라 코르테스 편을 든 국가들도 매한가지였지만 아즈텍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며, 그걸 하겠답시고 툭하면 주변국들에 대해 심한 착취와 압제를 200년 넘게 벌였다. 사람 심정이 '자기들끼리 하든지 말든지는 상관없지만, 그걸 하겠답시고 자기들을 찍어누르고 죽여대는 건 싫은' 법이다.] 타 부족들의 원한을 산 점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당장 츨락스칼리만 해도 수천명의 전사들을 지원했고, 수차례의 전투 뒤에 결국 코르테스 쪽으로 돌아선 부족들에 의해 아즈텍은 포위된다. 콩키스타도르들의 숫자는 한줌밖에 안되었지만,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아즈텍과의 전투에 동참했다.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처음 본 백인들에 놀란 원주민들은 그들을 신으로 여겼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은 환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서 아즈텍을 멸망시켰다." 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곳 원주민들도 다른 대부분의 문화권들에서 그러하듯이 매우 낯선 이방인들에게 적개심을 느꼈으며, 이를 전투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코르테스 이전에도 원주민들은 이미 백인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들도 자신들이 금을 약탈하러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콩키스타도르들이 신으로 환대받으며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는 잘못된 지식은 사실 복합적인 요소와 정보의 왜곡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전설인데, 우선 몬테수마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환대하는 듯한 서신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코르테스가 아즈텍 부족들을 초개처럼 쪼개면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중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는 탐욕스러운 신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강력한 정복자에게 보이는 굴복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코르테스 자신도, 아즈텍 정복의 정당화와 스페인 본국에서의 입지 향상을 위해, 자신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장식했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우리들을 신으로 여겼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코르테스가 몇 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일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아즈텍에게 압제당하던 부족들은 정말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피지배 부족 전체를 가축으로 삼고 막대한 공물을 뜯어내는 것도 모자라 툭하면 포로를 끌고 가서 인육으로 먹어대는 아즈텍이다. 저 짓거리들을 200년 넘게 저질러 온 자들이라 주변 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존재였는데, 이유야 어쨌건 그런 아즈텍을 물리치겠다고 나선 콩키스타도르들은 테오티클란이나 틀락스칼텍 같은 피지배 부족들에게는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자기들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말이다.[* 처음 틀락스칼텍은 에스파냐인들이 아즈텍인들처럼 자신들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해 죽어라 저항했는데 에스파냐인들은 인신공양과 식인이 엄격히 금지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 설득해서 화해한다.]

콩키스타도르와 케찰코아틀을 연관지은 건 그 신격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케찰코아틀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신화 자체가 백인, 인신공양 금지 등 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사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런 점 때문에 코르테스는 징기스칸 같은 무리들과 엮기는 뭐하다. 애초에 당시 아즈텍은 그냥 지역 깡패였다.[* 물론 주변 부족들이 200년 넘게 꼼짝 못하며 압제당해야 했으니 타 부족국가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르테스는 오툼바 전투에서와 같은 상식을 넘어선 전공이 있었다.

슬픔의 밤

파일:external/mxcity.mx/mxcity.mx_hernan-cortes.jpg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에게 환대받았다.[* 여기서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요'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하지만 이게 신앙에서 비롯된건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낸다. 이때 몬테수마의 딸과도 눈이 맞아 그녀를 애인으로 사귄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당하게 된다.[* 일설로는, 상황을 진정시케 해 보라고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마저 오히려 아즈텍 시민들이 야유하면서 던진 돌에 맞아 기절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천 명의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들과 수천 명의 틀락스칼텍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가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고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했고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삼회나 겪는 대패('슬픔의 밤', 1520.6.30)에서 천만다행으로, 아즈텍에는 애석하게도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는 로페스는 무사히 생존해 후일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때 핵심인이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재물들의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그나마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하려는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에게 압수됐다. 안습.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즈까지 이어졌다. 후퇴과정이 고난이었는데 식량부족에 시달린데다 아즈텍의 추격자들뿐만 아니라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부하들과 함께 질풍처럼 돌파한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 한 적이 수차 있었다. 흠좀무.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도 그렇게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정확한 투창 실력이 있었다.

그들은 도망치던 도중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의식을 다 때려엎고서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하고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였던 1만 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 귀가케 했다. 당시 아즈텍의 인신공양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소나 말, 돼지 같은 가축의 부재로 인하여 그 탓에 아직까지도 인신공양 풍습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하고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했다. 이후 인신공양은 사라지게 되었고 가축을 도축하여 바치는 방식으로 바뀐다.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를 기준으로도 인신공양 행위는 경악할 대상이었다. 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을 하는 끔찍한 행위는 단지 중세 유럽인들에게 비교적 이례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 원주민은 이교도였기에 이러한 행동이 더욱 합리화되었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 이 구조가 고도화 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의 짐이다.]

베라크루즈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쿠바 식민지 총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진압군이 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이번엔 무장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스페인군을 상대로도 놀랍게도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현지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닌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판국인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턱이 없었다. 카를 5세만 해도 걸핏하면 귀족들이 말 안듣고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본토에서조차 나 잘났다 너 못났다 식으로 맨날 투닥투닥거리는 판국에 지구급으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본토를 다스리는 왕이 뭐라 하면 그쪽 총독의 반응은 당연히 "어디서 개가 짖나?"였다.]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다.

오늘날 코르테스가 스페인 왕실에다 남긴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그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텍은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황제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다만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도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가 한 일이었다.] 이를 통해 에르난 코르테스의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열을 재정비한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으로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도착하였다.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편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에 억눌려 있었다. 200년 동안이나 인간목장 취급을 당해서 코르테스를 적극적으로 도운 틀락스칼텍인들만 해당된 게 아니라, 다른 부족들도 200년의 원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을 보장)하여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아즈텍 제국의 중심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오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포격을 당하니 피해가 엄청났다.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가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총 인구 500만, 수도 20만[* 당시 유럽에도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가 있다. 그밖에 제노바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았다. 그래도 유럽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한 대도시인 것은 맞다.]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

말년과 최후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은 한창 정권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새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취임하자마자 곧장 독일에서의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와 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새 국왕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 5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 5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 이탈리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유럽의 최정예 군대와의 전쟁,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왕을 접견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왕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코르테스의 호방함과 아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 황제는 코르테스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총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 5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더 이상 코르테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카를 5세는 그에게 두번 다시 신대륙으로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성공을 시기한 수많은 정적에게 시달려야 했다.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지만, 카를 5세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이룬 업적에 부담을 느껴서 줄곧 무시해왔고, 그러다 마지못해 한 번 알현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알현식 와중에서, 절차에 따라 코르테스에 스스로를 소개할 것을 요구한 카를 5세는 이런 답변을 듣는다.

>"I am a man, who has given you more provinces than your ancestors left you cities." >"저는 폐하의 조상들이 물려주신 도시들보다 넓은 영토를 폐하께 바친 사람입니다.[[1]] 이 대답이 마음에 든 카를 5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여기서도 성공가도를 걷는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알제리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난 스페인의 대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카를 5세도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남는다. 열이 뻗친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대거 해임한다.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계속되는 냉대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세비야에서 설사병에 시달리다 결국 1547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누에바에스파냐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평가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엘 시드의 뒤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기독교화의 주역인 대영웅으로 존경받았다. 페르난데스 오비에도는 코르테스를 엘 시드와 카이사르에 맞먹는, 아니 그들을 능가하는 대영웅으로 평가했고 이탈리아의 파올로 조비오도 코르테스를 고대와 중세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로 높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피정복자인 원주민들의 관점을 중시하는 수정주의, 민족주의 사관이 대두하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라스 카사스 신부가 그랬듯이 코르테스를 강제 개종과 제국주의적 정복을 일삼은 악당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관이 떠오르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선 멕시코 역사가 돈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를 시작으로 대영웅과 학살자 사이의, 객관적 접근을 중시하는 제 3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학살자론 부정 및 재평가

기본적으로 코르테스는 그들과 전쟁을 했고 그 전쟁에서 이겨 복속시켜 영토를 확장했을 뿐 학살자로 볼 수 없다는 관점이다. 학살이라는 것은 특정 집단을 복속(정복)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 전부 잡아 죽이는 것을 뜻한다.

설령 코르테스의 부대가 마을을 불태웠다고 해도 전쟁의 일환으로 한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심심풀이로 하거나 순전히 약탈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이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으면 모를까 원주민들도 무력으로 저항을 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원주민들도 전술이 발달하여 거의 대등하게 싸우게 된다.

게다가 스페인군이 왔을 때 원주민 세계는 이미 약육강식의 전쟁판이였고, 약소국은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들사이에서의 포로는 인육이 되어 먹히는 등 유럽과 달리 인권따위는 없는 곳이였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세계에 강자로써 들어왔을 뿐 도덕적으로 원주민보다 더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학살자라고 까이지만 정작 코르테스에게 책임을 물만한 학살은 많지 않다. 일단 코르테스는 빈약한 수의 사병(혹은 회유된 탈영병)이나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었고 딱히 학살을 원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책임이 약간이나마 있는 학살은 초룰라(cholura) 학살이나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초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고 함정을 파고 있었기에 공격한 것이며, 후자는 코르테스가 아닌, 그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와 면담하러 간 동안 지휘권을 받았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현장판단으로 인한 학살이었다. 그렇다면 코르테스는 전투로 인한 살상은 한 적이 있어도 죄없는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을 한 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

승자측의 기록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닌, 충분히 위협스러우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이 코르테스를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에 승리를 거두게 해준 요인이었다. 히틀러처럼 남미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는게 목적이였다면 외교플레이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코르테스가 아메리카를 공격한 콩키스타도르들 중에서도 가장 온건했던 정복자라는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당장 금 때문에 서인도 제도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량 학살해서 본국 스페인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니콜라스 데 오반도, 파나마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 중미 지역에서 중미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와 페드로 데 알바라도, 지금의 페루볼리비아 등 잉카 제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던 피사로 형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 플로리다, 미시시피, 앨라베마 등 현재의 미국 남부 지역에서 북미 원주민들을 죽였던 에르난도 데 소토, 칠레에서 마푸체족, 얄라카루페족, 야간족등 칠레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부려먹으며 식민지 영토 확장을 벌였던 페드로 데 발디비아 같은 다른 콩키스타도르들보다는 훨씬 온건했고 말린체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 의식이 적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제국주의 시절의 모든 정복자를 통털어도 상당히 온건한 축에 속하는 인물이다.

학살자론 긍정 및 부정적 평가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았다고 해서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초롤라의 경우, 아즈텍이 함정을 팠다는 내용은 당대의 전투기록이 아니라 이 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다. 일단 코르테스는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의 직접 쓴, 나후아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하여 최소한 코르테스 나름대로는 객관성 획득을 위해 노력하긴 하였다. 물론 말린체나 아구엘라 등, 코르테스의 원주민 친구들이 적당히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은 있다.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같이 간 틀락스칼텍인들이 알려주었다. 이 틀락스칼텍인이 통역 담당인 말린체라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틀락스칼텍인들이 아즈텍의 동맹인 초룰라를 어떤 식으로든지 제거하고 싶어한다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도 있다.

또한 코르테스의 책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작다면 모를까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간 정복자인 이상 그에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생겨난 모든 죽음에 대하여 코르테스에게는 명백한 책임이 있다. 전쟁행위였는가, 그렇지 않은 무차별 학살이었는가가 다를 뿐이다.

특히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였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다. 물론 나치처럼 대놓고 상부에서부터 학살을 주도한 케이스와는 차별점을 둘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단, 코르테스 본인을 학살자로 규정하려면 그가 적극적으로 학살을 명령했거나 유도, 내지는 방조한 정황이 더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멕시코 현지의 평가

현대 멕시코가 아즈텍 제국의 후신을 칭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아메리카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왜냐하면 코르테스는 멕시코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메스티소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과 많은 딸들을 낳았다고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코르테스는 자신의 메스티소 사생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만들려고 상당한 노력을 했고, 그들 중 네 명은 적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유언에서 메스티소 사생아들과 그 어머니(즉 자신의 원주민 현지처)들의 생활을 챙기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1946년 코르테스의 유골이 재발견되었을 때[* 왜 "재"발견이냐 하면 멕시코 독립 직후 원주민 정권에게 파괴당할까봐 유골을 소장하고 있던 병원 측에서 숨겨 버린 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쿠아우테목 동상 앞에서 화형에 처한 뒤 뼛가루는 공중에 뿌려 버려야 한다고 펄펄 날뛰며 분개했지만 메스티소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코르테스 영묘까지 만들어 가면서 축제 분위기였다.

1981년에는 당시 대통령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가 코르테스 흉상을 제막하는 등 코르테스 재평가를 주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좀 무리수였는지 흉상은 얼마 뒤 원주민 민족주의자들에게 파괴당했다.

반면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하는 페루볼리비아에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나쁜데, 이는 해당 국가들이 비록 메스티소 인구가 많긴 해도 각국의 전체 인구 중 메스티소가 아닌 순수 아메리카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는 에르난 코르테스보다도 더욱 극악무도한 과정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에 그만큼 더더욱 이미지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페루와 볼리비아의 백인들과 메스티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대놓고 찬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계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사별하여 재혼했고,[* 코르테스와 철천지원수인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의 처제였다. 그래서 당대부터 코르테스가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 번째 부인은 스페인 본국의 백작영애였다. 말린체와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혼 관계로 실질적 아내는 세 명이었다. 그 사이에서 6남 6녀를 두었다.

이중 애인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는 역사상 최초의 메스티소이다. 이 메스티소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한편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둔 적장남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부친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나 뉴멕시코의 왕이 되겠다고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 탈탈 털리고 땅을 빼앗긴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의 후광 덕에 목숨만은 건졌다. 반역 혐의로 한창 고문받던 도중에 카를 5세가 마르틴 코르테스의 고문관을 방문했고, 다음날 코르테스가 석방됨과 동시에 고문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스페인에서 죽는다. 스페인 국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와는 달리 고국에서도 인정받았던 모양.

코르테스의 자손들은 아직도 스페인에서 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자 계통 혈통이 자주 끊겨 코르테스라는 성을 직접 쓰지는 않지만[* 스페인식 이름은 외가들의 성울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데에 포함되기는 한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의 작위계승을 인정했다.], 어쨌든 [데 오아하카 후작] 작위를 가지고 아직도 귀족으로 대접을 받는다. 멕시코에서도 귀족이었지만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는 더 이상 귀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여담

반쯤 농담격이지만 이세계 전이물의 전형적인 용사 주인공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종족 히로인, 마왕군 토벌, 일기당천, 이종족동맹, 기술 등...

카카오를 처음 먹어본 구대륙 인물이기도 하다.

기묘하게도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7촌 관계의 친척이다.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매체에서

*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다.[*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
*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코르테즈의 행적을 까는 노래다.
* 근육맨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한 거한의 초인인 것으로 나오며, 잉카 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 죄다 레슬링 기술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엘도라도에서 최종보스로 출연한다.
*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의 주역으로, 자신을 케찰코아틀 신이라 믿는 말린체의 도움을 받아 간교한 술수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다.
* 스팀 상점에 있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HD 판의 유저 창작 모드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탈출맵을 구독해서 할수 있다.
* 문명 5의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나온다. 중남미 국가로 플레이 하다 코르테스가 나오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

참고문헌

*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2권, 에르난 코르테스 저, 앙헬 고메스 편, 김원중 역, 나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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