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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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세계사, 문명, 멕시코

[include(틀:멕시코의 역사)] {{{+1 Civilización maya}}} {{{+1 Maya Civilization}}} {{{+1 마야 文明}}} ||width=300||width=400|| ||전성기때 마야 영토|| || [목차]

개요

지금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멕시코 중부 ~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번성했던 문명이다. 마야문명이 번영했던 지역은 현재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역사

마야 문명의 달력은 기원전 3114년에 시작한다. 이 때가 마야 문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문명 최초의 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원전 3114년은 마야 문명이 시작되기보다 천 년 이상 전의 일이다.

최근에 기원전 2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기원전 3114년에 실제로 마야 문명이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2013년에는 올멕 문명보다 더 이전의 마야 문명 유물이 발견되기도 [[1]].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BC2600년경의 유적 연대는 BC1200년으로 재조정되었으며, 마야 토기 역시 BC 1200년에야 등장했을 뿐이다.

엘 미라도르(El Mirador)는 BC 600년 건설되어 BC 300~ AD 100년 경에 가장 번성하고 AD 300년 이후로 크게 쇠락해 800년경에 완전히 몰락했다. 최대인구는 10만.

거대 도시들이 건설된 것은 고전기라고 불리는 서기 250년 ~ 900년경의 시기로, 멕시코 남부와 유카탄 반도 남쪽에 걸쳐 유명한 티칼, 팔렌케, 코팔 등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마야 문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보이며, 주변의 다른 문명들과 광범위한 무역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얼핏 보면 고대 그리스와도 유사한, 도시 간의 교역을 통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서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졌는데, 명확한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마야 문자의 해독과 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우선, 마야의 쇠퇴에는 8세기 경부터 나타난 소빙하기가 1차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부 도시가 쇠퇴 국면에 접어들어 난민이 발생하고, 도시들 간의 교역도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붕괴의 시작은 교역의 중심지였던 칸쿠엔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8세기 중반 칸쿠엔은 주변 국가와 혼인 동맹과 같은 방식으로 우호를 이끌어낸 타지 찬 아크(Taj Chan Ahk)의 치세 아래 마야의 중심 권력으로 떠오르는데, 770년 경에 지어진 마야 최대의 궁전 유적지(2만 3000m²의 넓이에 200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가 바로 그의 치세에 지어졌다. 그러나 마야는 여전히 연합 국가의 단계였으므로, 타지 찬 아크의 권력은 타 국가들의 합의에 의해 얻은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그의 후계를 이은 칸 마악스(Kan Maax)는 권력의 중심지가 된 칸쿠엔을 노리는 주변국들의 분란에 휘말려 죽었고, 칸쿠엔은 이후 후계자를 내지 못한 채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교역의 핵이었던 칸쿠엔이 붕괴하고 각국이 서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무역 구조가 붕괴되었을 것이다. 이어 연쇄적으로 도시 국가들이 멸망했고 마야는 급속도로 쇠퇴한 듯하다.

고전기 마야가 몰락한 이후, 10세기에서 16세기 초까지 유카탄 반도 저지대에서 치첸 이차 등의 몇몇 새로운 도시들이 극소수 나타나 마야 문명을 부흥시켰는데, 이를 후기 마야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 마야의 도시들 역시 스페인 인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처럼 붕괴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침략했을 때까지도 마야 문명의 기록은 상당수가 남아있었고 마야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당시의 일부 스페인 학자들은 마야 문자와 그 발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많은 숫자가 죽었고, 남은 인구의 상당수도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희생되면서 마야 문자를 읽는 법 등은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다. 또한 마야의 기록 대부분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우고 말아,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4권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마야어는 고대 마야어와는 달리 로마자를 이용해서 표기한다.

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다.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 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 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만은 아니다.

수십 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시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렌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다.

2018년 2월, 콰테말라 정글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6만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인구 20만명 규모의 메가시티가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던 마야 문명의 모든 기본적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문명의 특징

놀랍도록 진보한 역법(曆法), 천문학에 대한 발달된 지식 등으로 보아 사람들에게는 한 개의 문명 대국이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철학적으로 발달했던 이미지로 자리잡혀 있지만, 마야 문자가 해독되어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문자가 해독되기 전까지 마야 학자들은 마야 문명이 고도의 철학적, 평화적 문명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특히 마야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릭 톰슨의 경우, 평화적인 마야 문명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마야 문자 해독을 통한 실체 접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마야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소장학자들이 본격적인 기록해독에 나서서 마야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마야 문명은 인신공양은 기본에 서로 업어치고 메치고 마약류의 환각제도 예사로 흡입하던 막장 난세였다. 하지만 이런 난세였기에 눈부신 문명 발전도 가능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같은 소도시국가의 연맹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그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지배를 하는 체제였다. 게다가 한 종족만으로 이루어진 문명도 아니라서, 마야어는 총 33개의 매우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져있다. 가령 마야 문자로 된 비석을 해독할 때에도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부터 알아야했기 때문에 매우 난해했다고 한다. 라틴 문자라틴어를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쓴 한국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야 문명의 뿌리는 일찍이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저지대 메소아메리카에 살던 토착민들에게서 비롯했는데, '마야'라는 이름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실체가 생긴 건 서기 300여년부터였다. 이때부터 끊임없는 전투와 개발의 역사가 메소아메리카 지대를 지배했다. 이 전모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해독이 된 마야 문자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마야의 멸망 원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전처럼 뜬구름 잡듯이 왔다 간 문명이 아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lacmul.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pan.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rigua.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edras_Negras.png|| ||Kalakmulis(칼라크믈)||Kopanas(코판)||Kirigua(키리과)||Piedras Negras|| 마야 문자

마야는 아주 철저한 기록 중심 사회로 한 해의 조세 기록과 호구 조사 등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이지만 표의문자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에서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

파일:attachment/마야 문명/mayan-block.gif 파일:마야문자 조합방식.png 그러나 그러한 하나의 조합은, 대체로 하나의 단어 전체를 나타내는지라 한글에서보다 조합이 더 복잡하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마야 문자는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도 여러개며, 여러 개의 기호가 조합될 때 몇몇 기호는 기호 전체를 표기하지 않고 기호의 일부분만을 앞의 기호 뒤에 붙여서 표기하는 등 표기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파일:attachment/마야 문명/mayan-number.gif 마야 문명의 또다른 특징은 0의 사용이다. 10, 100, 1000 등을 나타내는 별개의 기호가 있었던 중국이나 로마 등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 숫자에서처럼 0과 자릿수를 이용했던 것이다. 유라시아의 대부분의 문명과는 달리 마야문명에서는 20진법을 사용했다는 차이는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숫자체계는 마야문명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라 보다 이전의 문명인 올멕 문명[* 기원전 1400년경에서 기원전 400년경까지 번성했다. 아메리카에서는 0과 자릿수를 이용한 기수법의 역사가 상당히 길다.]에서 이미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20진법은 조금 특이한데, 보통의 기수법에서는 예를 들어 10진법이라면 자릿수가 1, 10, 10^^2^^, 10^^3^^, 10^^4^^ , … 이렇게 나가지만, 마야 문명에서의 20진법은 1, 20, 18×20, 18×20^^2^^, 18×20^^3^^, … 이렇게 나간다.

파일:sangaji_sem.jpg 여담이지만 해당 계산법의 모양은 조선시대에 널리 쓰이던 계산법이었던 '산가지 셈'(막대 모양으로 숫자를 계산한 방법)과 어느 정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산가지셈은 십진법으로 계산하였다.

마야문명의 달력은 1하압(Haab)이 365일로 이루어지고 1년 = 1508/1507 하압 = 365.242203일 이라는 복잡한 것이었지만, 이는 실제 1태양년과 불과 1.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단히 정확한 것이기도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경우 약 27초 차이가 난다. 태양력 항목 참조.[* 좀 복잡하긴 하지만 대략 4년마다 한번씩 윤년을 넣는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 1508년마다 한번씩 윤년이 없는 셈이니 십진법에서는 조금 편의성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오차는 적다.]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달력 및 기수법과는 대조적으로 마야문명을 포함한 아메리카의 문명에서는 야금술이 없었으며[* 아메리카에서도 금속이 사용된 사례가 있지만, 열을 가해서 녹이거나 변형시키는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고 단지 두드려서 평평하게 만든 후 무늬를 새기는 식이었다. 따라서 금속을 실용적인 물품을 제작할 재료로 사용하지는 못했고 장식품의 재료로만 소규모로 이용했다.] 바퀴 또한 발명되지 않았다. 이는 이나 같은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쇠퇴와 멸망(과거의 학설)

두 번째, 곧 후기 마야의 쇠퇴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선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 화전을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질 못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 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니, 이는 막무가내식 개발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이스터 섬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도시들에는 비교적 잘 들어맞는 반면,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의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에서는 화전 대신 세밀하게 짜여진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화전 방식에 비해서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되는 또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들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입혔다. 정글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차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다만 말 그대로 스페인의 주된 침략으로 인해 모두 절멸해버리고 원주민의 혈통이 끊겨버린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마야 지역에 해당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은 그나마 혈통을 많이 계승한 편이다.

스페인인들이 더 거대했던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를 정복하는 것보다 이 마야를 정벌하는 쪽이 더 오래 걸렸는데,[* 물론 현지 원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스페인의 정벌이 실패하여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받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남아메리카 중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했던 마푸체보다는 성공한 편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된 상태라 중앙정부가 부재하여 쪼개진 세력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했고, 경제 구조 자체가 박살나서 마야인들은 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지라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론

통념과 달리, 열대우림은 거의 녹색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굉장히 식량 생산력이 낮은 지역이다. 열대 우림은 굉장히 뛰어난 생산력과 재생력을 가지고 있지만 열대 우림의 "생산력"이 뛰어난 것이지 식량 생산량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식물도 독이 있는 것들이 많고, 먹이도 제한되어 있어서 대형동물들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 초식동물은 이 가장 크고, 맹수는 해봐야 재규어가 가장 크다. 그래서 사람도 목숨걸고 힘들게 사냥해봐야 얻는 고기가 적고, 채집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과일 정도밖에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이 임팔 작전에서 싸우다 죽었는지 굶어 죽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또한 농사도 쉽지 않았는데, 유카탄 반도는 풍부한 강수량과 일조량이 있는 지역이지만, 토양은 석회질이 많아 내린 비는 쉽게 빠져나가 지표에 남지 않고[* 북부 유카탄엔 지표에서 흐르는 강이 하나도 없다.] 강수량이 너무 많아서 매우 척박한 라테라이트 토양만 남는다. 이런 정글은 풍부한 일조량과 강수량 덕분에 삼림의 생산력은 뛰어나지만, 토양 침식으로 영양분이 되는 가용성 염기는 부족해서 식량이 될 수 있는 씨앗이나 과일종류의 생산력은 부족하다. 이런 이유로 농사를 지어도 일반적인 농법으로는 생산량이 적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과도한 토양침식에 대항할 가장 적합한 농법은 화전이었다. 불로 불필요한 임야를 태워주면, 가 마치 비료처럼 가용성 염기를 재공해서 땅이 비옥해져서 지력을 회복한다.

거기에 당시 중앙아메리카의 주요 수확작물은 옥수수라서 지력이 빨리 쇠하고 농토를 자주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윤작을 해서 지력을 회복하지만, 이나 알팔파같은 지력회복작물이 없던 아메리카에서는 땅을 그냥 방치해야 했고 이 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대지방 정글의 재생력(풀과 나무들이 다시 자라는 기간과 밀도)은 아주 뛰어나서 비워진 자리엔 금방 2차림이 들어서고 그럼 다시 태워서 화전을 경작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의 화전처럼 대규모 화전으로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면 모를까, 마야의 전성기의 인구를 생각하더라도 넓은 정글에 비하면 농경지는 굉장히 적은 비율이었다.

마야의 인신공양도 어디까지나 제의의 일부로 소규모로 이루어졌지, 아즈텍만큼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신공양도 대부분 사람이 죽지 않았고 지배층이 우선이었다. 왕은 자신의 음경을 뚫어 피를 뽑아 종이에 적셔 태우며 연기를 맡았고, 여왕가시가 있는 줄을 에 꿰었다. 그 외에 등의 신체부위를 찔러서 피를 바치거나 했는데, 물론 생명을 희생시키는 의례도 있었지만 주로 물에 던져넣는 방식이었고 연례행사 수준으로 '드문' 일이었다. 공경기에 대해선 말이 많지만, 패배팀을 전부 죽이는 건 주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 귀족의 포로들과 형식적으로 하다 죽이는 행위라거나, 승리팀의 주장을 죽이는 경우는 '신에게 드릴 건데 최고여야지'가 이유였다는 등 지역과 시기별로 차이가 크다. 그러나 이 역시 민중이 질릴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전쟁에만 골몰한 지배층에 민중이 등을 돌렸다는 학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마야에서도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는데, 마야 문명이 무너진 시기에 갑작스럽게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야 인들도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하는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문명의 사람들보다 특별히 멍청하거나 호전적이어서 자기들이 굶어죽을 판인데도 전쟁에만 골몰하다 파멸을 면치 못했을까?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문명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많은 도시들이 멸망했다고 하지만 이는 반대로 문명이 붕괴되는 시점이라서 도시들이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되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에 전쟁이 특별히 더 파괴적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이 시기에 전쟁이 더 파괴적으로 변할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다. 전쟁의 결과가 파괴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이는 붕괴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BBC 방영 Ancient Apocalypse시리즈 3편 The Maya Collapse에 의하면 한 유적지에선 도시가 쇠락한 시대로 추정되는 시대의, 가족단위의 살해된 성인과 아이들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치아에 보석 장식을 하고 있는 등 지배계층으로 추정되었다. 추측하자면 기근이 닥치고 제사장 계층이 그걸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제사장과 그 일가를 살해한 (추정으로는 인신공양을 해버린것 같다고) 것으로 여겨진다. 더이상 지배계급의 신성한 능력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성공한 반란은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이어지지 문명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러번의 대기근에서 살아남은 마야 북부의 인구는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로 추정된다.[*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천연두 등의 구대륙 질병이 들어오자 이런 인구감소가 재현된다.] 어느날 서울의 인구 90%가 죽으면 서울은 제대로 돌아갈까?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거나 나가는 것을 배제한다면, 남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훨씬 작은 무리로 살아가겠지만 행정력도 사라지고 기반산업도 무너져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위에 쓴 The Maya Collapse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고전기 마야의 멸망쯤에 소빙하기가 닥쳐 북대서양 고기압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로인해 원래 우기에 유카탄반도에 내려야 하는 비구름이 남쪽으로 가버려, 그지역에 그야말로 7000년 중의 최악의 가뭄이 찾아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물도 바닥나고 농사도 완전히 망치게 되는 바람에 위에 쓴 것처럼 이전의 10% 혹은 그이하수준의 인원만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몰락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마야에서 가뭄이 커다란 재앙이 된 이유는 구글지도,구글어스등 위성촬영 서비스로 유카탄반도를 보면 알겠지만 신기할 정도로 강이 안 보인다. 즉 있는 강들은 유량이 매우 적은 시냇물 수준의 좁디 좁은 넓이들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조금만 비가 안 내리기 시작하면 금방 건천이 되는 수준이다. 가뭄이 들어도 커다란 강을 중심으로 마를때까지 꽤 오래버틸수 있는 타 문명권과 달리 수분을 즉각적인 우량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선 가뭄으로 농사를 망쳐서 굶어죽는 것보다 수분을 섭취 못해서 죽는게 더 위험한 상황이다. 식량을 먹지 못해도 인간은 3주를 버틸수 있으나, 수분을 섭취 못하면 3일밖에 버틸 시간이 없다. 스페인의 식민 이후의 중미에서도 여러 번 심한 기근의 기록이 발견된다. 또한 현대까지도 원주민들 사이에선 기우제 의식이 남아있다.

마야인들의 실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했던 많은 문명들은 많은 실책과 문제점 투성이었지만 주도권을 잡고 번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의 장점과 세련된 문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기후의 변화, 화산활동 등의 자연재해로 멸망하거나 쇠퇴하기도 했다.

마야 종말론

마야의 역법은 서기 2012년에 끝난다는 설로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진실은 그냥 한바퀴 다 돈 것뿐이다. 십간십이지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갑자가 오는 것과 같은 것. 마야에서의 십간십이지에 해당하는 년도는 144,000일, 394.3년이다. 그리고 마야의 역법에 따르면 이 단위조차 한바퀴 순환하려면 서력 477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20진수인 마야력에서 2012년은 고작 13에 해당하는 절기일 뿐. 참고로 1에 해당하는 절기는 BC 3114년이었다. 마야인들이 가장 큰 단위인 B'ak'tun 이 끝나는 시기마다 큰 행사를 치른 건 사실이지만 지구 멸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서기 2012년 12월 21일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5월 10일 [달력이 발견되었다고]. --애초에 몇날까지 만들었든 그날 이후에 종말한다고 하면 그만이니-- 쉽게 말해서 5세기의 끝까지만 남은 달력을 보고 지구가 그 때 멸망한 거라고 해석한 꼴이었다.

* 영어 위키백과의 [항목]
* 달력에 대한 [[2]]

트리비아

* 캐나다에 사는 소년이 한 가지 독자적인 가설과 구글의 힘을 이용해 마야 유적을 하나 발견했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3]]
대충 '마야의 도시들은 왜 살기 편한 강가가 아니라 산기슭같은데서 살지?'라는 의문에서 시작해. '어쩌면 별자리를 따라 지었을지도'라는 가설을 세우고 구글 맵을 통해 각 마야 유적지를 확인했더니 117개의 유적지가 별자리와 비슷한 위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후 NASA정밀사진과 비교하던 중 발견되지 않았던 유적을 발견했다고.
그러나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4]] 위성사진으로 발견했다는 '유적'은 사실 버려진 화전일 가능성이 높으며, 마야인들이 별자리를 따라 도시를 건설했다는 근거도 없다고 한다. 과거 마야의 별자리 중 극히 적은 수만이 현재 알려져있으며, 그나마도 각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의 종류나 갯수는 알려져있지 않다. 학생이 확인했다는 별자리와 유적지 위치의 유사성은 단지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취미 중 하나가 마야 문자 번역이었는데, 다른 취미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이상은 한 모양. 실제로 마야 문자의 해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 동양의 오방색처럼 방향을 나타내는 5개의 색이 있는데 방향이 약간 다르다.
|| 방위 || 동양 || 마야 ||
||東|| 청색(녹색) || 적색 ||
||西|| 백색 || 흑색 ||
||南|| 적색 || 황색 ||
||北|| 흑색 || 백색 ||
||中|| 황색 || 녹색 ||
* 고대 문명이라고도 하지만, 16세기까지도 유카탄 반도 지역에서는 전성기만은 못 해도 세를 갖추고 있었고, 잔존한 마야족은 지금도 중앙아메리카에서 마야어를 사용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고대' 라는 것 자체가 지역마다 학자마다 다 다른 것이기에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태. 더불어 도시 문명이나 문자 등은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로소 학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 남아메리카 3대 문명 중 21세기인 현대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문명이다. 기록물들이 죄다 소실되는 바람에 고유의 마야문자가 사용되지 않을 뿐 멕시코의 경우 치아파스주와 유카탄주 일부지역에서는 초등학교 때 마야어를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되어 있으며, 전통 의식과 공놀이[* '피찰' 이라는 스포츠로 중요한 종교 의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전용 경기장 유적이 남아있는데, 양키 스타디움과 비슷한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청 앞이나 동네 축구장, 실내 경기장 등지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은 배구공을 쓰지만 예전에는 고무공을 사용했으며, 손과 발을 둘 다 쓰면 안 되고 머리, 상하박과 종아리를 주로 사용한다. 또한 예전에는 마야어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스페인어로 경기를 진행한다. 옛 마야 문명에 속했던 국가끼리 모여 [치르기도] 한다. (벨리즈는 영어를 쓰긴 하지만 스페인어도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공놀이에 참가하려고 하면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이 낫다.)]등은 현대화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몇몇 라디오 방송에서도 사용하고, 마야인들의 소셜 네트워크에 들어가 보면 기계 언어는 스페인어로 하면서 현대 마야어로 글을 올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유카탄주립자치대학교(UADY)에서는 [가르치며], 외부인들도 마야어 코스를 수강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마야 문명 지역 출신이 아닌데도 외국어 개념으로 마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과테말라는 아예 마야어를 공용어로 쓰기도 한다.
* 현대 마야어의 외래어는 보통 스페인어에서 차용해서 사용한다. [[5]][* 유카탄 방송인 만큼 유카탄 마야어를 사용한다.]

관련 항목

* 올멕
* 톨텍 문명
* 아포칼립토

분류:사라진 국가분류:아메리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