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브라운

From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필독 사항 유닠스 계열 저작물, 성인물, 도박 웹 써버 보안 프로그래밍 그래핔 파싱
필독 사항 고스트BSD 표면 웹 싸이트 제작 리눅스 마스터 파이썬 트킨터 뷰티펄 숲
수학 아이투피 마약, 아청물, 해킹 웹 싸이트 보안 웹 프로그래밍 데이터 분석 게임 제작
통계학 뮤와이어 다크넽 싸이트 제작 정보 보안 기사 쟁고우 팬더즈 파이게임

에바 브라운, 히틀러를 사랑한 여자

에바 브라운, 17살의 그녀는 그 또래가 그렇듯 꾸미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평범한 그녀에게 단 하나 별난 점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히틀러였다.

오늘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살인마이자 당시 독일의 최고 권력자였던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에 대해서 알아보자.


< 에바 브라운 : 1912년 2월 6일 ~ 1945 4월 30일 >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독일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독일은 전쟁에서 진데다 연합군과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침략국에게 막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했다. ( 베르사유 조약 참고 / 두산 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269&cid=40942&categoryId=31659 )


<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과 몰려든 취재진 >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자리가 없어 살길이 막막했다. 존경받던 교사였던 프리츠 브라운과 재봉사인 프란 지스카는 전쟁이 끝나자 뮌헨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어린 세 딸과 함께 중산층 가정을 꾸렸다.


< 왼쪽부터 일저, 프리츠 브라운, 프란 지스카, 그레틀, 에바 브라운 >

에바는 1912년 2월 6일,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맏언니 일저는 에바보다 3살이 많았고 막내 그레틀은 3살이 어렸다.


< 언니 일저와 에바 브라운 >

세딸은 자유로운 성격이었는데 특히 에바는 꾀병으로 식사시간에 빠져나오거나 친구들을 꼬셔서 숙제를 맡기는 개구쟁이였다. 에바는 말썽쟁이였지만 부모님과의 사이는 좋았다.

1920년대 후반, 브라운 가족은 유산을 상속받아 부유해졌고 뮌헨의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 했다. 프리츠는 에바가 예술가가 되길 바랐기 때문에 음악, 미술, 무용을 가르쳤다. 하지만 에바는 또래 젊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화장과 옷, 다이어트, 남자에 관심이 많았고 파티와 춤추길 즐겼다. 1928년, 16살이 된 에바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카톨릭 수도원 여학교로 보내졌다.


< 수도원에서의 에바 브라운 >

하지만 자유분방했던 에바는 그 해 가을 갑갑한 수도원을 떠났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에바는 하인리 호프만이 운영하는 작은 사진관에 일자리를 얻었다.


< 하인리 호프만의 사진관 / 40살의 히틀러 사진이 걸려있었다. >

호프만의 단골 고객 중에는 나치당원들이 포함되어있었고 히틀러도 그의 단골 고객이었다. 1929년이 되자 나치당은 독일 의회에서 상당한 의석 수를 확보했고 강력한 나치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명성은 높아져갔다.


< 아돌프 히틀러 :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 >

어느 날 저녁, 히틀러가 호프만의 사진관에 들렸고 사다리 위에서 선반을 정리하던 에바 브라운을 발견했다. 젊은 여자를 좋아했던 히틀러는 에바의 늘씬한 다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호프만은 에바를 불러 히틀러를 ' 볼프' 씨라고 소개했는데 볼프는 히틀러의 가명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던 에바는 히틀러를 알아보지 못했고 호프만이 그가 히틀러라고 귀띔해줬지만 그녀는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조차 몰랐다. 에바가 마음에 든 히틀러는 에바를 만나기 위해 자주 사진관에 들렸고 자연스레 둘의 사이는 점점 발전했다. 차츰 에바는 자신보다 23살이나 많은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

1930년대, 1차 대전 이후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없었던 독일의 상황 속에서 히틀러의 우익 나치당은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다.


< 1933년 히틀러와 나치당 >

히틀러와 에바 사이는 뜨거웠다. 히틀러는 에바를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하곤 했다.


< 히틀러와 에바의 저녁 식사 >

에바는 히틀러와의 관계를 가족들에게 숨겨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츠와 언니 일저가가 히틀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에바의 언니 일저는 유대인 의사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반유대적 발언을 하는 히틀러를 강하게 증오했다.


< 언니 일저 / 동생 그레틀 / 에바 >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 자리에 올랐다. 대중들은 그가 어떻게 수상 자리에 올랐는지 그 과정은 몰랐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에게 환호를 보낼 뿐이었다.


<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군중들 >

히틀러와 에바의 관계는 계속 됐고 히틀러는 여자가 똑똑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에바는 히틀러의 완벽한 짝이었다. 히틀러는 ' 챠퍼렐(오스트리아 말로 착한 소녀란 뜻) ' 이 라는 애칭으로 에바를 불렀다.


< 챠퍼렐 ( 착한 소녀 )로 불린 에바 >

나치당의 건축가이자 최고위층이었던 알베르트 스피어의 말에 의하면 히틀러는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여자란 그저 즐기기 위한 존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히틀러에게 에바는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듯하다. 실제로 히틀러에게는 에바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들도 있었다. 1931년에는 정부 중 한 명이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겔리 라우발히틀러의 배다른 누이, 안젤라이었다. 10대 시절부터 히틀러를 사랑했던 겔리는 히틀러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러던 1931년 9월 17일, 에바가 히틀러에게 쓴 연애편지를 발견한 겔리는 히틀러의 권총으로 자살해버렸다. ( 에바와 히틀러가 사귀기 직전 )


< 겔리 라우발 / 겔리와 히틀러 >

겔리의 자살로 히틀러는 큰 충격에 빠졌고 그녀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

겔리가 죽고 에바는 히틀러의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히틀러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어 했지만 에바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1932년 가을, 점점 권력이 커지면서 자신에게 소원해진 히틀러를 에바는 몹시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선거 운동 때문에 에바를 만날 수 없었다. 에바는 그리운 마음을 담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자 아버지의 권총을 꺼내들고 심장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비켜나가면서 총알은 에바의 목을 스쳤다. 목숨을 건진 에바는 부모님에겐 단순한 사고라고 둘러댔다.

에바의 자살기도 후 몇 달 뒤 브라운 부부는 독일 시골을 여행하다가 차에서 함께 내리는 히틀러와 20살의 에바와 마주쳤다. 둘의 사이를 알게 된 부부는 반대했지만 에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35년, 프리츠 브라운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냈다.

' 우리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소. 당신이 마음대로 쓰라고 내준 아파트로 내 딸, 에바와 그레틀이 이사해버렸기 때문이오. 가장인 나는 모든 일을 사후에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소. 구닥다리라고도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의 집과 보호로부터 벗어나선 안된다는 신념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


< 에바와 그레틀 >

프리츠는 이 분노에 찬 편지를 호프만에게 전해줬고 편지는 히틀러가 아닌 에바의 손에 들어갔다. 에바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결국엔 에바의 부모님도 둘의 사이를 인정했다. 브라운 부부는 자신의 딸이 히틀러의 연인이란 사실에 우쭐해했고 한편으론 그저 애인일 뿐이란 생각에 걱정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한 여자한테만 자신의 인생을 바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1934년 6월 30일 '피의 숙청'(장검의 밤)이 실행됐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던 100명을 살해했다. 그때가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의 연인이 된지 2년째였다. 에바는 히틀러가 사람을 죽인 범죄자임을 알고서도 함께 살길 원했다. 그녀에게 정치적 문제 따윈 상관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히틀러와의 즐거운 삶뿐이었다. 에바는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하면서 인생을 즐겼다.


< 홈 비디오속 에바 >

하지만 에바는 공식적인 배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선 나타날 수 없었다. 히틀러의 권력은 커져갔고 그에 따라 바빠졌다. 1935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에바를 방치했다. 몇 달 동안 에바는 히틀러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 맙소사, 오늘도 답장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누가 나를 좀 도와주길 모든 상황이 너무 어둡다. 편 지를 쓰지 말 걸 그랬다. 불확실한 지금 상황이 갑작스러운 이별보다 더 두렵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오늘 그의 답장을 받아야 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이미 알약 35알을 준비했어요.

이번에는 죽어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 전화라도 걸어준다면 좋으련만...'

1935년 5월 28일, 에바의 일기장

에바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했지만 곧 바로 발견되서 목숨을 건졌다. 에바의 두 번째 자살기도 후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 베르고프로 에바를 보냈다. 에바는 베르고프의 여주인이 되어 12명의 고용인들을 부리며 생활했다.


< 베르고프 산장 / 베르고프에서 에바와 히틀러 >

에바가 베르고프에서 누렸던 것들을 살펴보자.

- 벤츠 자동차와 기사 ( 쇼핑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제공 ) - 수많은 옷과 악세사리 ( 각종 모피부터 다양 ) - 1년 내내 거주하는 전용 요리사 ( 식사 시간이 규칙적이지 않아서 ) - 강아지들과 산책하거나 나치 친위대와 웃고 떠들기 - 수영과 등산 ( 운동을 좋아했음 ) - 컬러 카메라 소유 ( 홈 비디오 엄청 찍음 ) - 반입이 금지된 미국 영화 즐김 - 지하에 볼링장 만듦

에바가 즐거운 산장 생활을 하는 동안 히틀러는 대부분의 정적을 숙청했다. 물론 에바의 머릿속엔 히틀러와 같이 있을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에바의 역할은 한 가지였다. 성욕을 해결할 도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 악마는 왜 나를 데려가지 않을까? 지옥이 여기보다 나을 것 같다. 그는 나를 특정한 목적으로만 필요로 한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

1935년, 에바의 일기장 중


< 에바와 히틀러 >

히틀러에바를 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그중에는 독일의 유명한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도 있었다.


< 레니 리펜슈탈 / 히틀러와 레니 리펜슈탈 >

재치와 지식, 거기다 나치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나치당의 공식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임명됐고 그녀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SS 친위대에 가입했다. 리펜슈탈의 영화 ' 의지의 승리 '는 나치즘과 친위대를 전국적으로 선전했다.


< 레니 리펜슈탈 / 영화 ' 의지의 승리 ' >

그녀와 히틀러는 한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했지만 레니 리펜슈탈이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관계는 끝났다. 히틀러는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히틀러가 만난 여자들은 지적인 스타일들로 에바와 정반대였다. 히틀러는 에바에게 공부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에바가 할 줄 아는 것은 호프만의 사진관에서 배운 사진 찍는 법과 인화하는 법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바는 평소 히틀러의 사진을 많이 찍었고 히틀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히틀러의 사진을 찍는 에바 >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에바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히틀러가 딴 여자들을 만날 시간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 베르고프에서 에바 >

폴란드를 침공한지 9개월 만인 1940년 6월, 독일군은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북부를 점령했다. 파리와 빈이 히틀러의 손에 넘어갔다.


< 파리 에펠탑 앞의 히틀러 >

그 시각 에바는 베르고프에서 영화 잡지와 로맨스 소설을 읽었고 최고급 란제리와 수영복을 즐겨 입었다. 에바와 에바의 친구들은 베르고프에서 수다를 떨면서 즐겁게 지냈고 이야기의 화제는 히틀러였다. 에바는 평소 존경심을 가득 담아 ' 총통님 '이라는 애칭으로 히틀러를 불렀다.


< 그레틀과 에바 >

에바의 가족 중 언니 일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히틀러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프리츠는 공식적으로 나치당의 일원이 되었으며 여동생 그레틀은 베르고프에서 에바와 함께 지냈다.

즐거운 베르고프의 산 너머 소금광산에선 유대인의 시체가 쌓여갔다. 에바는 유대인을 증오하는 히틀러에게 유대인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유대인 학살은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에게 에바는 완벽했다.


< 유대인 수용소 >

16살 때 에바가 있었던 수도원이 나치의 훈련장으로 쓰일 위기에 처하자 수녀들은 에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바에겐 그것을 막아줄 영향력도 없었거니와 부탁을 들어줄 생각조차도 없었다. 에바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히틀러의 사랑뿐이었고 나머지는 자신과 다 무관한 일이었다.

1940년, 독일은 영국과의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기세도 한풀 꺾였지만 역시나 에바의 관심 밖이었다. 이듬해 30살이 된 에바는 전쟁 때문에 독일에서 화장품 생산이 중단되자 심하게 짜증을 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고 독일의 러시아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동안 에바는 동생 그레틀이 SS 친위대 장교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봤다. 에바가 꿈꾸던 결혼식을 여동생인 그레틀이 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4년 7월 20일 독일의 장교들은 마침내 히틀러의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중상을 피한 히틀러는 에바에게 괜찮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히틀러의 편지를 받은 에바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어요. 당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이 죽도록 두렵습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세요. 미쳐버릴 것 같아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죽을 거라고 말씀드렸죠? 저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맹세했어요. 당신을 따라서 어디든 가겠어요.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저는 당신의 사랑으로만 살아가요. 에바로부터 '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오자 히틀러는 베르고프를 떠나 베를린의 총통관저를 잠시 방문하기로 했다. 러시아군이 베를린으로 온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바는 히틀러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에바와 히틀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고 에바는 히틀러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1945년 3월이 되자 러시아군은 베를린 함락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히틀러와 에바는 총통관저 지하에 있는 넓은 벙커에 숨어지냈다.

'장군들은 모두 나를 배신했다. 독일 국민들은 쓸모없는 존재다. 내가 그토록 싸웠건만 국가사회주의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모두 유대인들 때문이다. '

이 말을 비서에게 받아 적게 하고 히틀러는 에바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마음먹었다. 1945년 4월 29일 이른 아침, 정식 결혼 서류에 에바는 자신의 성 브라운대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바 히틀러라고 서명했다.


< 히틀러와 에바 >

평생을 바라고 바랬던 히틀러와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에바는 결혼한 지 36시간 뒤에 생을 마감했다. 1945년 4월 30일 오후, 히틀러 부부는 함께 목숨을 끊었다. 히틀러는 청산가리를 삼킨 뒤 권총으로 자신을 쐈고 에바는 독약을 마셨다.


< 히틀러 부부가 죽은 지하 벙커 >

사람들은 시신에다 가솔린을 붙고 불을 붙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에바 사후 재판을 받았지만 기소되진 않았다. 그녀는 나치당원이었던 적도 없었거니와 어떤 쪽으로든 관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브라운 부부는 뮌헨 외곽의 작은 마을로 이사해 조용하고 평범한 여생을 보냈다.

' 그가 나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 지금 같은 행복이 변하지 않기를 매일 기도한다.

어느 날 그의 사랑이 떠나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길 빈다. '

' 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사랑한다는 그의 말은 언제나 그 순간뿐이다.

지키지 않는 그의 약속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나를 버리지 왜 괴롭히기만 할까? ' 

에바의 일기 중


같이 보기